CodePoet / Essay

지워도 되는 것

위에서도 아래에서도 기대가 다 나에게로 모이는데, 목록의 한 줄도 자를 수가 없던 밤. 지울 게 없어서가 아니라 지워도 되는 게 뭔지 몰라서였다. 물속에서야 순서가 보였다 — 진작 못 자른 게 아니라, 이제야 자를 수 있게 된 것이었다.
2026-07-25
리더무기력우선순위회고

사무실에 마지막까지 남은 불은 내 자리였다.

다들 돌아간 지 오래였다. 모니터 불빛만 얼굴에 얹혀 있고, 화면에는 아직 닫지 못한 목록이 열려 있었다. 위에서 내려온 것, 아래에서 올라온 것. 급한 것과 급해 보이는 것. 어느 것도 내 것이 아니면서, 전부 내 것이었다.

목록은 오늘 것만이 아니었다. 그 아래로, 미처 손대지 못한 숙제들이 층층이 쌓여 있었다. 하나를 겨우 쳐내도 줄어드는 느낌이 없었다. 밑에서 두 개가 올라왔다. 게다가 그건 나 혼자 짊어진 것도 아니었다 — 우리 유닛이 다 해내야 하는 일이었고, 그 몫이 결국 내 자리로 모였다.

이상한 건 따로 있었다. 나는 분명 열심히 하고 있었다. 그런데 티가 나지 않았다. 열심히 할수록, 오히려 내가 그리던 그림에서 조금씩 어긋나는 것 같았다. 이게 맞나. 이 방향이 맞나. 물어도 답은 목록 어디에도 없었다.

나는 커서를 목록 맨 위에 얹어두고 한참을 그대로 있었다. 지울 게 없어서가 아니었다 — 지워도 되는 게 뭔지, 그걸 알 수가 없었다.

목록의 줄마다 얼굴이 하나씩 붙어 있었다. 이건 꼭 됐으면 좋겠다던 사람. 자네가 맡았으니 믿는다던 사람. 열심히 했는데 왜 티가 안 나느냐고, 묻지 않았지만 묻고 있던 사람. 다들 저마다의 성과를 바라고 있었고, 그 마음들이 하나같이 틀린 데가 없었다. 틀린 말이 없어서, 하나도 자를 수가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나는 정말 알 수 없었다.

줄이면 된다는 걸 나도 알았다. 안 될 것 같은 건 접고, 순서를 바꾸고, 애초에 안 해도 됐을 것들을 지우면. 아는데도 못 했다. 아니, 진작 그러지 못한 건가 싶어 손끝이 더 무거워졌다.

그런 밤이면 나는 물에 들어갔다. 아니면 눈을 감고 앉아 숨만 셌다. 물속에서는 아무도 나를 부르지 않았다. 스물다섯 미터, 숨 하나. 벽을 짚고 고개를 들면 그제야 목록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그런데 이상하게, 물 밖에서 그토록 무겁던 줄들이 물속에선 순서가 보였다. 이건 안 되겠다. 이건 처음부터 없어도 됐다.

자책이 한 겹 벗겨졌다. 처음부터 뭘 자르고 뭘 남길지 어떻게 알았겠나. 한동안 그 안에 잠겨 있어봐야 보이는 것들이었다. 진작 못 자른 게 아니라, 이제야 자를 수 있게 된 거였다.

나는 물에서 나왔다. 목록은 그대로였다. 다만 내일 아침엔, 맨 윗줄 하나쯤은 지울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글에 남긴 포스트잇0

아직 포스트잇이 없어요. 첫 자리를 남겨보세요.

이어 읽을 글
공책에 그린 보드게임재미이론이라는 책을 붙들고 좋아했던 게임들을 줄줄이 적다가, 내가 왜 배우는 게 재밌는지를 묻게 됐다. 지난 글들을 다시 펼치고 나서야 장면 하나가 떠올랐다 — 어릴 때 공책에 칸을 긋고 만든 보드게임을 누군가와 같이 하던 때. 평생 찾던 기쁨이 거기 있었다. 개발자가 되는 건 그 공책을 넓히려던 손이었고, AI 덕에 공책이 다시 내 손에 돌아왔다. 만드는 기술을 배우는 재미는 AI가 가져갔지만, 사람이라는 끝없는 판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오래 붙든 콘텐츠는 하나같이 무언가를 가르쳐 줬다 — 누군가 그걸 깨닫고 웃는 얼굴을 보는 것, 그게 충만감이었다.그만두고 싶은 이유를 세어 보았다리더를 그만두고 싶다는 마음이 올해 내내 있었다. 디렉터와 이야기하기 전에 그 이유를 하나씩 세어 보았다. 가운데 낀 양가감정, 실무를 못 하는 우울, 줄 수 있는 게 칭찬뿐인 손, 끝이 없는 목표, 정해지지 않은 AI 사용료. 아무나 할 수 있게 해 주는 건 저점을 올리는 일이지 고점을 올리는 일이 아니라는 것도 보였다. 세다 보니 이유들이 한 곳을 가리켰다 — 일은 한데 모였는데, 일하는 판은 각자 하던 때 그대로였다. 하소연 말고 가안 한 장을 들고 가기로 한다. 그만두고 싶은 마음은 그대로인 채로. 다시 읽고서야 R&R은 어떻게 짜든 부딪힌다는 것, 가장 큰 빈칸은 내 기준이었다는 것이 보였다.북쪽이라고만 말했다한참 준비한 일을 사내 소프트런칭으로 내놓았고 결과도 좋았다. 잠깐 행복했고, 그다음엔 우울이 왔다. 대기업과의 경쟁, 모호한 지시, 북쪽을 보자는데 동쪽 서쪽으로 뛰는 사람들, 그리고 일 잘하던 팀원의 퇴사. 위에서 내려오는 말이 흐릿하다고 답답해하던 내가, 아래에는 '북쪽'이라는 방향 한마디만 건넸다는 걸 알았다. 사람을 움직이는 건 내가 열심히 해서 되는 일이 아니었다. 내가 요구할 수 있는 건 기대하는 결과를 분명히 하는 것뿐이었다 — 아직 우울한 채로, 그 말하는 법부터 연습하기로 한다.
v2026.10.31.1 · 2026. 11.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