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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은 신호다4 / 4

감정은 신호였다

될지 안 될지 모르는 일을 기한 안에 해내야 하는 요즘, 가장 고약한 건 모르는 걸 모르는 상태였다. 사람에게는 AI에 없는 센서가 있다 — 감정이다. 화남·슬픔·억울함·감동은 내가 모르던 무언가가 근처에 있다는 신호이고, 모델이 loss로 배우듯 사람은 감정으로 모름을 감지한다. 감정을 신호로 읽기 시작하자 마음의 힘듦과 해야 할 일·해야 할 말이 갈라졌다 — 재촉하는 사람의 불안도 같은 신호였다. 그리고 사람도 환각한다 — 모른다는 걸 모른 채 아는 해법으로 문제의 본질을 덮는다. 부딪혀야 신호가 온다.
2026-08-29 · 3회 읽음
감정신호메타인지리더십

그려지지 않는 그림

요즘 일이 힘들다. 도달해야 할 목표에는 공감한다. 왜 필요한지도 안다. 그런데 그게 되는 그림이 내 머릿속에 그려지지 않는다.

나는 원체 모든 일이 명쾌하게 그려지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다. 대화도 그렇다. 추상적인 말이 오가면 꼭 구체적인 예시까지 내려가 확인해야 직성이 풀린다. 상대와 온전히 싱크됐다, 하는 그 감각을 몹시 즐긴다. 그래서 나와 이야기하면 한 시간이 금방 간다. 요즘처럼 일이 몰릴 때는 그 한 시간이 사치라서, 정말 해야 할 말만 하자고 나를 다그친다.

호기심이 많고, 가설을 세우고, 실험하고, 눈으로 확인하는 걸 즐긴다. R&D라는 일이 나와 잘 맞았던 이유다. 미리 연구해 둔 것까지는 결과가 그려진다. 그런데 마지막의 마지막, 극한의 퀄리티를 좇는 자리에 서면 — 한 번도 가 보지 않은 미지의 영역이 남는다. 거기부터는 그림이 없다.

그러니까 지금이 그 자리다. 그려지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 그려지지 않는 일 앞에 서 있다.

그리고 나는 그 그려지지 않는 일을 누군가에게 나눠 줘야 하는 자리에 있다. 내가 모르는 일을 남에게 맡기는 일. 몇 번을 해도 이건 익숙해지지 않는다.

내 머릿속에서 결과물이 선명하지 않은 일은, 나부터 납득이 안 된다. 납득이 안 된 채로는 남에게 설명해서 맡기는 것도 잘 안 된다. 그렇게 넘긴 일은 해 봐야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최근 이 상황에 여럿 놓이고서야 이것도 알아차렸다. 아, 이건 내가 구체화해야 하는 거구나. 내가 답을 찾아야 하는 거구나. 아니면 모른다고 빨리 말해야 하는 거구나 — 나 몰라요, 원하시는 게 이거예요, 저거예요? 하고 되물어야 하는 거구나.

기한은 있다. 될지 안 될지는 모른다. 그런데 무조건 되어야 한다. 이 세 문장이 요즘 한 문장처럼 붙어 다닌다.

솔직히 적는다. 회사에 가기 싫었다. 어떤 대화는 시작하기 전부터 지쳤다.

모르는 걸 모르는 상태

아는 것을 안다. 모르는 것을 안다. 모르는 것을 모른다.

셋 중 마지막이 제일 고약하다. 모르는 것을 알면 질문이라도 할 수 있다. 찾아보면 되고, 물어보면 되고, 배우면 된다. 그런데 모르는 걸 모르면 질문 자체가 만들어지지 않는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서가 아니라, 어디를 모르는지 몰라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그리고 이 상태는 이름표를 달고 오지 않는다. 억울함으로 온다. 열심히 하고 있는데 왜 자꾸 어긋나는지 모르겠는, 그 억울함으로.

사람에게만 있는 센서

매일 AI와 일하면서 알게 된 것이 있다. AI는 모르는 걸 모르는 채로 말한다. 막힘이 없고, 떨림이 없다. 우리는 그걸 환각이라고 부른다. 그냥, 모르는 상태다. 자기가 무엇을 모르는지 알려 주는 장치가 그 안에는 없다.

얼마 전 본 발표에서 같은 이야기를 들었다. 자기만의 코딩 에이전트를 만든 개발자 마리오 제히너가, 에이전트가 쏟아내는 코드 얘기 끝에 이렇게 말했다. 사람은 고통을 느낀다. 고통이 너무 커지면 사람은 뭐라도 한다 — 일을 그만두든, 다 같이 코드를 뜯어고치든. 에이전트는 아무렇지 않게 계속 간다. 실수는 배움 없이 쌓이고, 그 고통은 뒤늦게 사람에게 도착한다고. 에이전트는 우리처럼 배우지 않는다고. (▶️ Building pi in a World of Slop)

사람은 다르다는 걸, 요즘에야 알았다. 이론이 아니라 겪어서다. 압박이 극에 달해서 사람들에게 화를 내고, 눈물까지 흘리고 — 그 상태를 몇 번 뚫고 나온 뒤에야 보였다. 그때 몸이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는 걸. 너 지금 네가 모르는 일을 하고 있어. 뭘 모르는지 모르는 상태야. 잠시 긴장을 풀고, 거기서 나와서, 어디가 막혀 있는지 찬찬히 돌아봐. 진짜 문제 — 네가 막힌 포인트를 찾아야 해. 화남, 슬픔, 억울함, 어떤 날은 뜬금없는 감동. 하나로 이름 붙일 수 없는 이 복합적인 감정이 그 신호였다. 머리보다 몸이 먼저 알고 있었다.

학습의 언어로 옮기면 이상하게 정확해진다. 모델은 손실이 있어야 배운다. 예측과 현실의 어긋남, 그만큼이 학습의 재료다. 감정은 사람의 loss다. 내가 그려 둔 세계와 실제 세계가 어긋날 때 울리는 값. 크게 어긋날수록 크게 울린다.

다만 AI의 loss는 밖에서 온다. 뭘 모르는지 사람이 찾아내서 먹여 줘야 배운다. 사람의 loss는 안에서 울린다. 온몸이 알려 준다 — 모르는 걸 모르는 자리에 서 있다고, 지금이 배울 때라고.

겪어 보니 울림에도 결이 있다. 화는 지금 크게 어긋나고 있다는 신호다. 슬픔은 잃고 나서야 울린다 — 그게 내게 그만큼 소중했다는 걸, 잃기 전에는 몰랐던 것이다.

감정은 치워야 할 것인 줄 알았다. 눌러 두고, 다스리고, 일이 끝난 뒤에 처리할 것. 돌아보니 반대였다. 감정이 먼저 알고 있었다.

(감정이 전부 나의 것이라고 적은 적이 있다. 이번에 안 것은 그다음이다 — 그 감정들이 무엇을 하는지.)

사람도 환각한다

그런데 최근, 사람들과 이야기하다가 깜짝 놀랐다. 사람도 그런다.

자기가 모른다는 걸 인지하지 못한 채, 아는 해법으로 이것저것 말한다. 일을 부탁하면 이런 답이 돌아온다. 그건 저분 작업이 끝나야 해서 기다려야 해요. R&R이 먼저 명확해져야 할 것 같아요. 타겟이 명확해야 하지 않을까요. 근데 이거, 정말 해야 하는 일 맞아요? 하나하나 틀린 말이 아니다. 그래서 더 알아차리기 어렵다. 그런데 그 맞는 말들이 정작 풀어야 할 문제를 덮는다. 본질을 가리고, 시선을 교묘하게 다른 데로 돌린다.

이제는 가려서 듣기로 한다. 내가 일감을 뭉뚱그려 던졌다면 — 고쳐서 나와야 할 input과 output을 구체적으로 주지 않았다면 — 저 말들이 맞다. 먼저 고칠 건 내 쪽이다. 그런데 input과 output이 명확한데도 같은 말이 돌아온다면, 그건 문제를 피해 가는 길이다.

나라고 다를까. 억울함에 싸여 열심히만 하던 나도 내가 아는 방식 안에서 맴돌고 있었는지 모른다. 환각에는 고통이 없다. 부딪혀야 울린다. 봐야 할 문제의 본질에 부딪히는 것. 신호는 거기서 온다.

덩어리가 갈라진다

감정을 신호로 읽기 시작하니 이상한 일이 생겼다. 마음의 힘듦이 일에서 떨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이번 일이 그렇다. 여러 번 말했다. 이건 어렵다고. 기한 안에 될지 모르겠다고. 장기 과제로 돌리고 싶다고. 그래도 물음은 멈추지 않는다. 다음 주까지면 된다고 보면 되겠죠? 주말 근무도 고려 중이신가요?

전에는 이 물음들이 통째로 아팠다. 회사에 가기 싫다는 마음도, 이 사람과는 말이 안 통한다는 마음도 그냥 한 덩어리였다. 그런데 신호로 읽으니 덩어리가 갈라진다. 내 억울함은 나도 이게 되는 그림을 모른다는 신호. 그의 재촉은 그의 불안이고 — 그도 이게 되는 그림을 모른다는 신호. 말이 안 통하는 게 아니었다. 둘 다 모르는 걸 모르는 자리에 서 있는 것이었다.

그렇게 갈라 놓고 나니, 해야 할 일과 해야 할 말이 구분되기 시작한다.

해야 할 일, 해야 할 말

해야 할 일부터. 이런 일은 보통 각자의 직관에 맡겨져 굴러간다. 그런데 이건 그러기엔 너무 중요하고, 기한이 있다. 그래서 모이기로 한다. 해 볼 수 있는 경우의 수를 전부 꺼내 놓고, 가장 그럴듯한 것부터 나눠 맡고, 언제까지 해 보고 결과를 올릴지 같이 정하는 것. 실제로 이번 주, 몇 명이 한자리에 모여 각자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을 꺼내 놓았더니 따로따로 굴리던 의문들이 반나절 만에 풀렸다. 모르는 걸 모르는 상태는 혼자서는 못 벗어난다. 조각을 서로 나눠 쥐고 있으니까.

해야 할 말은 아직 고르는 중이다. 논의해서 이런 시도들이 나왔고, 언제까지 각자 해 보고 결과를 올리겠습니다. 다만 될지 안 될지는 모르겠습니다. — 여기까지가 사실이다. 그런데 마지막 문장은, 지금 불안한 사람을 더 불안하게만 할 것 같아서 몇 번을 삼켰다.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로 접어야 하나. 아니면 거꾸로, 우리가 못 본 수가 있는지 그에게 물어야 하나.

아직 답을 못 정했다. 다만 달라진 게 있다. 예전 같으면 이 고민은 통째로 마음의 고통이었을 것이다. 지금은 문장의 선택이다. 신호와 일이 분리되고 나서야, 고민은 풀 수 있는 문제의 모양을 갖췄다.

신호는 계속 온다

그날 저녁, 동료가 하루 종일 확인한 결과들을 채널에 올렸다. 재촉하던 그가 답을 달았다. 와. 엄청난데요.

감동도 감정이다. 그도 몰랐던 무언가를 만난 것이다.

될지 안 될지는 여전히 모른다. 압박도 사라지지 않았다. 다만 이제 그 압박이 어디서 오는지는 안다. 월요일에는 모여서 정리하기로 한다. 해 볼 수 있는 수들, 나눠 맡을 시도들, 결과를 올릴 날짜. 그 사이사이 감정은 계속 올 것이다. 화남으로, 억울함으로, 슬픔으로, 어떤 날은 감동으로. 그때마다 무너지는 대신 읽어 보기로 한다.

모르는 걸 모르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런데 몸은 그걸 먼저 알고, 울려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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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부터 나는 최맹보다홍명보가 화면에 'FIGHT' 한 단어만 띄우고 '싸워'를 반복하던 국가대표팀 다큐 장면이 밈이 됐다. 웃다가 뜨끔했다 — 명확한 결과물이 안 그려질 때 나도 팀 앞에 큰 그림 하나 걸어놓고 '싸워'라고 하고 있었으니까. 개발자로 살던 내가 리더가 되며 나를 버렸다. 홍명보가 2024년 취임 회견에서 '저는 저를 버렸습니다'라고 했던 것처럼(2014년엔 '대한민국이 날 버렸어'라며 버림받은 쪽이었지만). 옳게 짜인 구조보다 리소스 효율·목적·결과물로 판단하는 자리로 옮기자, 오래 나를 붙들던 꺼림칙함이 남았다 — 이거 이렇게 해도 되나. 분류학을 들여다보다 그 정체를 알았다. 그 불편함은 코드에 새겨진 진실이 아니라, 여러 자리의 시각을 한꺼번에 켜둔 채 아직 어느 축으로 결정할지 못 정한 상태에서 나는 잡음이었다. 이걸로도 되고 저걸로도 되는데 한쪽이 공수가 더 들면 동작하는 걸로 간다. 장기적 문제는 다른 축이 던지는 질문이고, 이 규모·이 시점 축에선 답이 이미 나와 있다. 다만 어떤 꺼림칙함은 잡음이 아니라 진짜 신호다 — 그 둘을 가려내는 게 지금 내 숙제다.뿌옇게 읽어도 된다룰루 밀러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를 《죽음의 수용소에서》·《무엇이 내 인생을 만드는가》와 나란히 읽었다. 낯선 책이 뿌옇게 읽히는 게 오래 내 탓인 줄 알았는데, 독서는 완성된 영화가 아니라 문장이 올 때마다 흐릿한 모형을 고쳐 짓는 일이었다. 완모식표본은 종의 모범생이 아니라 이름이 떠내려가지 않게 박은 닻이고, 임베딩·클러스터링도 같은 일을 한다 — 기준이 지도를 만든다. 그러다 알았다. 개발자로 살다 막 리더가 된 내가 매일 하는 일이 이거였다는 걸. 모르는 걸 실패로 오역해 화가 났고, 그 화는 실은 경계의 신호였고, 프랑클이 말한 유머로 반 뼘 올라서니 나를 화나게 한 사람 얼굴에 내 얼굴이 겹쳤다. 분류는 세상 그 자체가 아니라, 어떤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 특정 관점에서 그린 임시적인 지도다.결과물을 내기 위해 산 적이 없다궁금해서 읽고 만들다 보니 배웠고, 돈은 그 끝에서 굴러 들어온 부산물이었다. 그런데 리더가 되니 석 달 뒤의 결과물을 미리 그려 쥐여 주는 일이 왔다. 회사를 탓할 수는 없다 — 결과물은 조직이 미래를 이야기하는 프로토콜이니까. 그러면 방향을 주면 되는가. 방향에는 정밀도가 있었다. 누구도 반대할 수 없는 문장은 아직 방향이 아니고, 북극성이 하나여도 발밑이 다르면 첫걸음은 반대다. 하나의 방향을 사람 수만큼의 다음 걸음으로 옮기는 일 — 그 이름은 번역이었다.
dev · 2026. 9.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