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이 나의 것
마흔에, 애니메이션을 보다 울었다.
영화는 꼭 요즘의 나 같았다. 하루에도 몇 번씩 온갖 감정이 소용돌이치던, 그 어지러운 속이. 마지막에 그 감정들이 한데 모여 하나의 자아를 끌어안는 장면에서, 나는 알아버렸다. 저 뒤엉킨 게 나구나. 더는 기쁨 하나로만 웃지 못하는, 마흔의 나.
순수한 기쁨. 그건 내가 이제 온전히는 못 느끼는 감정이다. 그런데 윤슬이가 그걸 느낄 때 — 아무것도 섞이지 않은 그 웃음을 볼 때 — 나는 대리만족이라 부르기엔 너무 큰 기쁨에 젖는다. 잃어버린 줄도 몰랐던 내 조각 하나를, 아이가 대신 주워 들고 있는 것 같아서.
그제야 알았다. 내가 왜 그 아이에게 모든 시간과 열정을 쏟았는지. 아내에게도 그랬는지. 주기만 한 줄 알았는데, 나는 거기서 나를 돌려받고 있었다.
영화는 좋은 감정만 골라 담을 수 없다고 했다. 기쁨이가, 걱정이가, 서로 라일리를 쥐려 했지만 — 라일리를 정하는 건 결국 그 누구도 아니었다. 그 수많은 감정이 통째로 라일리였다. 윤슬이가 지금 저렇게 감정에 즉흥적인 것도, 그 진실이 아이 몸으로 그냥 살아 있는 것이었다.
마지막에 라일리가 도리어 기쁨이를 부르던 장면에서, 이름도 못 붙일 무언가가 가슴에서 차올랐다. 어떻게 이런 이야기를 지었을까, 싶은 채로.
울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마흔이 되어서도 이렇게 운다는 것. 감정에 솔직하게 자랄 수 있었다는 것. 순수한 기쁨을 다시 온전히 갖진 못해도, 이 뒤엉킨 감정들이 전부 내 것이라는 것 — 그 시간을 오롯이 느끼는 사람이 나라는 것. 그래서 나는 감사한다.
힘든 시기였다. 그런 때에 하필 이 영화가 왔다는 것도.
아직 포스트잇이 없어요. 첫 자리를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