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자기 탐구·자립·삶·배움 — 수신의 기록.
감정은 신호다
뿌옇게 읽어도 된다
룰루 밀러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를 《죽음의 수용소에서》·《무엇이 내 인생을 만드는가》와 나란히 읽었다. 낯선 책이 뿌옇게 읽히는 게 오래 내 탓인 줄 알았는데, 독서는 완성된 영화가 아니라 문장이 올 때마다 흐릿한 모형을 고쳐 짓는 일이었다. 완모식표본은 종의 모범생이 아니라 이름이 떠내려가지 않게 박은 닻이고, 임베딩·클러스터링도 같은 일을 한다 — 기준이 지도를 만든다. 그러다 알았다. 개발자로 살다 막 리더가 된 내가 매일 하는 일이 이거였다는 걸. 모르는 걸 실패로 오역해 화가 났고, 그 화는 실은 경계의 신호였고, 프랑클이 말한 유머로 반 뼘 올라서니 나를 화나게 한 사람 얼굴에 내 얼굴이 겹쳤다. 분류는 세상 그 자체가 아니라, 어떤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 특정 관점에서 그린 임시적인 지도다.
이제부터 나는 최맹보다
홍명보가 화면에 'FIGHT' 한 단어만 띄우고 '싸워'를 반복하던 국가대표팀 다큐 장면이 밈이 됐다. 웃다가 뜨끔했다 — 명확한 결과물이 안 그려질 때 나도 팀 앞에 큰 그림 하나 걸어놓고 '싸워'라고 하고 있었으니까. 개발자로 살던 내가 리더가 되며 나를 버렸다. 홍명보가 2024년 취임 회견에서 '저는 저를 버렸습니다'라고 했던 것처럼(2014년엔 '대한민국이 날 버렸어'라며 버림받은 쪽이었지만). 옳게 짜인 구조보다 리소스 효율·목적·결과물로 판단하는 자리로 옮기자, 오래 나를 붙들던 꺼림칙함이 남았다 — 이거 이렇게 해도 되나. 분류학을 들여다보다 그 정체를 알았다. 그 불편함은 코드에 새겨진 진실이 아니라, 여러 자리의 시각을 한꺼번에 켜둔 채 아직 어느 축으로 결정할지 못 정한 상태에서 나는 잡음이었다. 이걸로도 되고 저걸로도 되는데 한쪽이 공수가 더 들면 동작하는 걸로 간다. 장기적 문제는 다른 축이 던지는 질문이고, 이 규모·이 시점 축에선 답이 이미 나와 있다. 다만 어떤 꺼림칙함은 잡음이 아니라 진짜 신호다 — 그 둘을 가려내는 게 지금 내 숙제다.
감정이 나의 것
마흔에 인사이드아웃2를 보다 울었다. 순수한 기쁨은 이제 온전히 못 느끼지만, 윤슬이가 그걸 느낄 때 잃어버린 조각을 줍는 것 같았다. 좋은 감정만 골라 내가 될 수는 없다 — 뒤엉킨 그 감정들이 전부 내 것이고, 그 시간을 오롯이 느끼는 사람이 나라는 것을 감사한다.
감정은 신호였다
될지 안 될지 모르는 일을 기한 안에 해내야 하는 요즘, 가장 고약한 건 모르는 걸 모르는 상태였다. 사람에게는 AI에 없는 센서가 있다 — 감정이다. 화남·슬픔·억울함·감동은 내가 모르던 무언가가 근처에 있다는 신호이고, 모델이 loss로 배우듯 사람은 감정으로 모름을 감지한다. 감정을 신호로 읽기 시작하자 마음의 힘듦과 해야 할 일·해야 할 말이 갈라졌다 — 재촉하는 사람의 불안도 같은 신호였다. 그리고 사람도 환각한다 — 모른다는 걸 모른 채 아는 해법으로 문제의 본질을 덮는다. 부딪혀야 신호가 온다.
프로그래머가 그림을 배우는 방법
어디서 시작할까
집에 가는 길이 길어졌다
목적이 사라지면 익숙한 길도 방황이 된다. 워크샵이 끝난 자유시간, 집으로 바로 가지 못하고 잠실의 텅 빈 키즈카페와 롤러장을 돌던 하루. 아는 형은 내 변명을 바로잡았다 — 키맨이 없는 게 아니라 방향과 결과물이 안 잡히는 거라고. 길을 잃었다 싶을 때 비어 있는 건 길도 사람도 아니라 '내가 어디로 가는지'였고, 그건 누가 채워주는 게 아니라 스스로 또렷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백지에서 시작하던 사람이, 주어진 틀 안에서 길을 잃는 이야기.
수요가 없는 곳에서 시작하고 있었다
만드는 데만 관심 있던 사람이 '수요에서 시작해야 한다'를 깨달았다 — 이번에 회사에서 이 일을 겪은 것과, 최근 시작한 경제·시장 공부(반도체·데이터센터 수요)가 엮이면서. 데이터센터 사례가 가르쳐준 건 — 수요가 '있다'와 '동작한다'는 다른 말이라는 것. 회사에선 고객의 목소리가 없어 길을 잃었고, 그래서 내가 그 제품의 가장 깊은 사용자가 되어 그 목소리를 대신 만들기로 했다. '집에 가는 길이 길어졌다'의 동반 글.
꺼내지 않으면, 배운 게 아니다
배움에서 가장 중요한 건 집어넣는 게 아니라 꺼내는 것 — 내 것을 output으로 만들어 봐야 비로소 배운 게 된다. 꺼내기 전엔 무엇을 아는지 모르는지조차 모른다. 그리고 가장 멀리 가는 건 좋아하는 걸 꺼낼 때. 좋아함도 결국 하나의 수요 — 내가 그것의 가장 정직한 수요자다. 바깥의 수요에서 시작하는 글의 짝이 되는, 안의 좋아함에서 시작하는 이야기.
내 게임을 만들기 위해
내 게임을 만들기 위해 혼자가 되려고 했었다
완전히 혼자가 되려 했다 — 그리고 그 길에서 익힌 모든 것이, 여럿이 함께 일할 때 가장 필요한 것이었다. 자립과 행복과 삶을 묻는 시리즈의 프롤로그.
모든 것을 나에게 귀결시키면 계단이 놓인다
혼자이고 싶었던 나의 분노가 남탓이었다는 것, 그 출구를 닫고 안으로 들어가자 길이 보이기 시작했다. 시리즈 2편.
컴퓨터에게 걸던 말, 사람에게 걸리는 말
why와 what이 주어지면 how는 내 영역이었다. 컴퓨터와의 대화는 그랬다. 사람과의 일은 그렇지 않았다. 매체가 바뀌자 같은 문법이 다른 기술이 됐다. 시리즈 3편.
끝그림과 최소 스펙 사이 — 모든 것은 부트스트랩이었다
끝그림 없이 시작하면 표류하고, 끝그림만 붙잡으면 출발하지 못한다. POC → prototype → MVP. 모든 거대한 일은 최소한에서 자란다. 시리즈 4편.
나는 왜 남을 위해서만 일하지 — 결국 고객은 나였다
research-*, market, trending, games, gemify. 만들어 놓고 보니 모든 시도에 공통점이 있었다. 내가 나의 고객이었다. 시리즈 5편.
혼자 서는 법은 다같이 잘하는 법과 같았다
혼자이고 싶어 붙잡고 배운 것들이 — 결국 다같이 잘하는 법이었다. 어느 학문이든 끝에 도달하면 궁극은 같다. 시리즈 6편.
자립과 행복과 삶 — 세 질문의 답
시리즈 마지막 편. 프롤로그에서 던졌던 세 질문에 대한 지금의 답. 결론이되 완결은 아니다. 시리즈 7편(최종).
낱글
지워도 되는 것
위에서도 아래에서도 기대가 다 나에게로 모이는데, 목록의 한 줄도 자를 수가 없던 밤. 지울 게 없어서가 아니라 지워도 되는 게 뭔지 몰라서였다. 물속에서야 순서가 보였다 — 진작 못 자른 게 아니라, 이제야 자를 수 있게 된 것이었다.
결과물을 내기 위해 산 적이 없다
궁금해서 읽고 만들다 보니 배웠고, 돈은 그 끝에서 굴러 들어온 부산물이었다. 그런데 리더가 되니 석 달 뒤의 결과물을 미리 그려 쥐여 주는 일이 왔다. 회사를 탓할 수는 없다 — 결과물은 조직이 미래를 이야기하는 프로토콜이니까. 그러면 방향을 주면 되는가. 방향에는 정밀도가 있었다. 누구도 반대할 수 없는 문장은 아직 방향이 아니고, 북극성이 하나여도 발밑이 다르면 첫걸음은 반대다. 하나의 방향을 사람 수만큼의 다음 걸음으로 옮기는 일 — 그 이름은 번역이었다.
말하면 만들어 주는 사람
딸에게 오늘 뭘 얻고 싶은지 생각하며 살자고 말해 놓고 멈칫했다. 나는 그렇게 산 적이 없다 — 늘 즉흥으로 떠오른 과제를 쫓았고, 오래 바란 건 말하면 뭐든 만들어 주는 프로그래머였다. 이제 방향을 정해야겠다 마음먹자 도리어 걸렸다. 방향이 없어서 가벼웠던 건 아닐까. 시키면 만드는 자는 결함이 아니라 원체였고, 나는 방향을 남에게 열어 두고 살아온 것이었다. 그런데 이제야 정말 만들 수 있을 것 같아지자 도리어 회사가 방해처럼 느껴진다. 잠정 방향 하나를 적어 둔다 — 사람들의 문제를 발견하고, 풀고, 거기서 돈을 번다.
오늘 우울하니
주말 이틀이 선물 같았다. 토요일은 어린이집 친구네와, 일요일은 대학 후배의 결혼식과 서울랜드에서 — 아내를 소개해 준 형님과 아이들, 우연히 만난 단짝까지. 돌아오는 길 환한 보름달에 모두 건강하고 행복하길 빌었다. 아직 답을 못 찾은 어려운 시기지만, 받기만 하던 내가 집에 와 처음으로 아내에게 물었다. 오늘 우울하니. 받은 이틀이 나를 열어, 비로소 곁의 감정을 더듬게 했다.
물은 어디에 고이나
안경 하나로 수능을 풀어 1등급이 나오는 세상. 답이 헐값이 되자 나는 물었다 — 이제 가치는 어디에 고이나. 무섭고 우울했는데, 정작 무서웠던 건 돈이 아니라 딸이었다. 답을 아는 자리가 죄다 헐값이 된 세상에서 윤슬에게 뭘 물려줄까. 수요를 좇지 말고 좋아하는 걸 끝까지 파 수요를 만드는 것, 그 너머는 호기심만이 연다는 것, 파인만의 흔들리는 접시. 문제가 다 풀린 세상에서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신념은 대물림된다
인사이드 아웃 2에서 신념이 형태를 갖춰 자라는 장면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 들여다보니 감사였다. 신념은 타고나는 게 아니라 지어지고 대물림되는 것. 부모가 깔아준 바탕 위에 내가 짓고, 이제 딸이 제 신념을 짓기 시작한다. 부모에게서 나에게로, 나에게서 딸에게로 이어지는 한 가닥에 대한 글.
마음의 풍요
아내가 일주일 입원한 사이, 혼자 아이를 등하원시키고 집안일과 회사일을 도맡았다. 그 한 주의 끝에 누군가 나를 좋은 사람이라 불렀다. 그 말이 고마웠던 건, 그 좋음이 내가 만든 게 아니라 받아서 쌓인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정승제의 다섯 태도, 상담사가 되어준 아내, 그리고 윤슬에게 물려주고 싶은 한 가지.
AI 시대의 감사 — 제때 알 수 있었다는 것
ChatGPT가 등장하고, 아이가 자라고, 내가 개발자로 살아가는 이 시점이 우연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
결국 공부라는 것, 이 모든 게 번역이었나?
번역기에서 시작해 LLM이 되기까지 — 언어, 전문가 지식, 그리고 Transformer를 이어주는 하나의 실.
1+1을 천 번 반복시키는 이유
딸아이의 원리셈을 보며 깨달은 것 — 반복은 암기가 아니라, 뇌의 작업 기억을 확보하는 최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