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시대의 감사 — 제때 알 수 있었다는 것
들어가며
2022년 11월, ChatGPT가 세상에 나왔다. 그리고 그때 나는 개발자였다.
이 두 문장이 같은 시간 위에 포개져 있다는 것 — 처음에는 그게 얼마나 드문 우연인지 몰랐다. 큰 물결은 늘 누군가의 한복판을 지나간다. 다만 그 한복판에 서 있던 사람이, 지금 자기 발밑을 지나는 게 물결이라는 걸 알아보는 일은 드물다. 나는 운이 좋았다. 알아볼 수 있는 자리에 서 있었으니까.
제때 알 수 있었다는 것
언젠가 윤슬이 물었다. 아빠, AI가 뭐야? 그때 나는 대답할 수 있었다. "인공지능이야"로 끝내지 않고, 그게 어떻게 작동하는지, 왜 하필 지금 중요한지, 앞으로 무엇이 달라질지를 아이의 눈높이에 맞춰 풀어 줄 수 있었다.

그건 내가 똑똑해서가 아니다. 제때, 그 자리에 있었기 때문이다. 같은 질문이 십 년 빨리 왔다면 나는 어물거렸을 것이고, 십 년 늦게 왔다면 아이는 이미 나보다 더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하필 내가 답할 수 있는 그 짧은 구간에 아이의 물음이 떨어졌다는 것 — 그게 우연치고는 과분했다.
감사란, 내가 가진 것이 당연하지 않다는 자각이다.
이 한 줄은 그 뒤로 내 안에 오래 남았다. 한참 뒤에 쓴 다른 글에서, 나는 같은 말을 당연한 건 없다는 더 짧은 주문으로 다시 적게 된다. 돌아보면 그 주문의 씨앗이 여기, 이 물음에 답할 수 있었던 저녁에 떨어져 있었던 셈이다.
개발자라는 위치
코드를 쓸 수 있다는 것. LLM의 API를 직접 호출할 수 있다는 것. 프롬프트를 설계하고, 그 결과를 평가하고, 거기에 시스템을 얹어 무언가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
이것들을 하나씩 떼어 놓고 보면 별것 아닌 기능 목록 같다. 그런데 묶어 놓고 보면 의미가 달라진다. 2026년 현재, 이건 지금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도구를 남의 손을 빌리지 않고 직접 다룰 수 있는 자리에 내가 서 있다는 뜻이다. 누군가는 그 도구를 멀리서 두려워하고, 누군가는 그게 무엇인지도 모르는 채 휩쓸린다. 나는 그 도구를 손에 쥐고, 만져 보고, 길들여 볼 수 있는 쪽에 우연히 놓여 있었다.
이것 역시 내가 잘나서 얻은 자리가 아니다. 어쩌다 이 길로 들어섰고, 어쩌다 그 길 위에서 물결을 만났을 뿐이다. 그러니 더더욱, 당연한 것이 아니다.
아이와 함께 보는 미래
윤슬은 올해 여덟 살이다. 이 아이가 대학에 갈 즈음이면, AI는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얼굴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때 무엇이 옳은 도구이고 무엇이 위험한지, 나는 미리 가르쳐 줄 수 없다. 그 세계의 규칙은 그 세계에 가서야 보일 테니까.
그래서 지금 내가 해줄 수 있는 가장 좋은 일은, 정답을 쥐여 주는 게 아니라 AI와 함께 사는 태도를 곁에서 보여 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만져 보고 부려 보는 도구로서.
사실 그건 이미 우리 일상에 들어와 있다. 아침이면 헤이 구글에게 일곱 시에 깨워 달라고 말하고, 어느 날은 내가 만든 AI 그림을 두고 그 고양이는 전혀 귀엽지 않다며 단호하게 디렉션을 주기도 한다. 회사에서 하던 이미지 생성 AI 연구를 집까지 끌고 와, ▶️ 딸아이를 메이플스토리 캐릭터로 만들어 본 적도 있다. 일과 아이와 도구가 한자리에서 만나던 순간이었다.
아이는 이미 AI를 무서워하지 않는다. 그저 마음에 안 들면 고쳐 달라고 말할 줄 아는, 도구를 부리는 사람으로 자라고 있다.
내가 바라는 건 거기에 한 줄을 더 얹는 것뿐이다. 나는 못 해가 아니라 아직 못 할 뿐이라고 스스로에게 말하는 태도. 도구가 아무리 강력해져도, 결국 그 도구 앞에 선 사람이 자기에게 들려주는 이야기가 더 중요하다는 것. 그것만은 AI가 대신 가르쳐 주지 못한다.
마무리
감사는 거창한 것이 아니다.
큰 물결이 지나가는 자리에, 마침 그것을 알아볼 눈을 가지고 서 있었다는 것. 아이가 물었을 때 답할 수 있었고, 그 답을 일상으로 보여 줄 수 있었다는 것. 제때 알 수 있었다는 것 — 그 자체가, 당연하지 않은 감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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