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서는 법은 다같이 잘하는 법과 같았다
수렴
오래 공부를 하다 보면, 어느 순간 이상한 일이 일어난다.
다른 학문들이 같은 말을 하고 있다. 엔지니어링의 클린 아키텍처, 심리학의 자기연민, 경영학의 조직론, 철학의 자기인식, 육아의 과정 칭찬 — 겉의 어휘는 제각각인데, 결을 따라 내려가 보면 같은 뼈대가 나온다.
처음엔 우연이라 생각했다. 두 번째엔 우연의 일치라 여겼다. 세 번째부터는 확신했다. 어느 학문이든 끝에 도달하면 궁극은 같다.
내가 혼자 배운 것들의 목록
나는 혼자이고 싶어서 많은 것을 배웠다.
- 요구를 명확히 쓰는 법
- 시스템을 작은 단위로 쪼개는 법
- 각 단위를 독립적으로 동작하도록 설계하는 법
- 실패한 출력을 보고 원인을 찾는 법
- 피드백을 받아 다시 고치는 법
- 추상을 세우고, 필요한 때 허무는 법
- 문서를 남기는 법
- 작은 단위로 자주 배포하는 법
이 모든 것을 나는 컴퓨터에게 말을 걸며 익혔다. 내가 좋아하는 일이었다. 이 일에는 사람이 없으니까 편안했다.
그런데 이것들의 정체
이것들이 무엇인지, 이제는 안다.
- 명세 쓰기 = 요구 사항 합의
- 쪼개기 = 업무 분담
- 독립성 = 모듈 간 결합도 관리, 팀 자율성
- 실패 분석 = 회고
- 피드백 루프 = 1on1, 리뷰 문화
- 추상 = 공통 언어 만들기
- 문서 = 지식 공유
- 작은 단위 배포 = 점진적 변화
혼자이고 싶어 익힌 것들이 — 여럿이 잘 일할 때 가장 필요한 것들 이었다. 하나도 예외 없이.
아이러니의 봉합
정말 이상했다.
나는 사람들과 일하기 싫어서 컴퓨터를 파고들었는데, 그 파고듦이 나를 사람들과 더 잘 일하게 만드는 도구로 바꿔 놓았다. 도망친 곳이 훈련장이었다. 숨은 방이 교실이었다.
매체만 바뀌었을 뿐이다. 언어는 같은 언어였다.
이 봉합을 받아들이고 나서, 나는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하고 있다는 감각이 사라졌다. 회사에서는 사람을, 퇴근 후에는 컴퓨터를. 이 이분법이 무너졌다. 나는 오직 하나의 언어를 쓰고 있었다. 단지 앞의 대상이 때로 컴퓨터이고, 때로 사람이었을 뿐이다.
자립의 새로운 정의
그래서 내가 생각하는 자립의 정의가 바뀌었다.
- 예전의 자립 — 다른 사람 없이도 내가 동작하는 것
- 지금의 자립 — 내가 누구 앞에 서더라도 같은 언어로 일할 수 있는 것
이것이 왜 더 자유로운가 하면, 전자는 관계를 회피해서 얻는 평온이고, 후자는 관계 속에서도 유지되는 평온이기 때문이다. 전자는 약하고, 후자는 단단하다.
그래서 이제는
그래서 이제 나는 "혼자 잘하는 법" 이라는 말과 "다같이 잘하는 법" 이라는 말을 다르게 쓰지 않는다.
그 둘은 결국 같은 기술이다. 그 기술을 어떤 매체에 대고 쓰느냐만 다를 뿐이다.
그리고 이 깨달음은, 내가 애초에 왜 혼자이고 싶었는지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나는 사람이 싫었던 게 아니다. 사람 앞에서 내 언어가 흔들리는 것이 두려웠던 것이다. 그 두려움은 이제 조금씩, 도구가 되어 가고 있다.
아직 포스트잇이 없어요. 첫 자리를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