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을 나에게 귀결시키면 계단이 놓인다
들어가며
나는 오래도록 회사에 분노가 있었다.
내 의견이 거절당하고, 내가 중요한 사람으로 여겨지지 않고, 내 가치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고 느껴지는 순간들이 쌓여 있었다. 그 분노의 출구는 늘 바깥을 향했다. 위를 탓하고, 옆을 탓하고, 때로는 시스템 전체를 탓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그 출구가 조금씩 닫혔다.
훌륭한 조직에 있다는 것
신기하게도 계기는 바깥에서 왔다.
지금 나는 아주 훌륭한 조직에서, 굳이 내가 하지 않아도 아주 잘 만드는 분들을 만났다. 그러니 내가 하나부터 열까지 다 챙겨야 한다는 부담이 줄었다. 그리고 그만큼, 나는 내 것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내 것"이라는 공간이 생기자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문제가 안으로 들어오면
남탓이 줄어들었다.
회사의 어떤 결정이 나를 답답하게 할 때, 나는 그 결정 자체를 공격하는 대신 "나는 이 결정 안에서 무엇을 할 수 있나" 를 먼저 생각하기 시작했다. 가족의 어떤 문제가 무거울 때, 상대를 탓하는 대신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나" 를 먼저 생각했다.
그러자 모든 문제가 내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 이건 정말 기이한 감각이었다 — 문제가 내 안으로 들어오자, 길이 보이기 시작했다.
마치 어지러운 방에 섰을 때, 밖을 향해 소리를 지르면 아무것도 치워지지 않지만, 내가 몸을 한 번 숙여 바닥의 한 물건을 집어 들면, 그다음 물건이 보이고, 또 그다음 물건이 보이는 것처럼. 하나씩, 계단이 놓이듯.
분노의 정체
돌이켜 보니 내가 회사에 대해 느꼈던 분노의 정체는 생각보다 단순했다.
나는 내가 소중하게 여겨지지 않는다고 느꼈다.
의견이 거절당하는 것 자체가 문제가 아니었다. 거절이 쌓였을 때, 그 쌓임이 "나는 여기서 중요하지 않다" 로 해석된 것이 문제였다.
이걸 인정하고 나서야, 나는 그 감정을 다룰 수 있게 되었다. 감정이 바깥의 무엇 때문이 아니라 내 해석의 결과라면, 그 해석을 바꾸는 것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남탓의 출구가 닫힐 때
남을 탓하지 않는다는 것은, 남을 이해한다는 뜻이 아니다. 남을 용서한다는 뜻도 아니다. 그저 그 문제를 다룰 수 있는 사람이 나밖에 없다는 것을, 한 번 인정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인정이 길을 연다.
나는 이 감각을 가족 안에서도 똑같이 확인했다. 남 탓이 닫히면, 신기하게도 어렵고 혼란스러운 상황도 하나씩 풀린다. 내가 먼저 움직이기 시작하면, 다른 것들이 따라오는 순간이 있다.
남은 일
그래서 지금 나에게 남은 일은 이것이다.
내 안으로 계속 돌아가는 것. 남탓이 올라올 때마다 그것을 잠시 내려두고, "이 문제를 내 것으로 만들면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나" 를 묻는 것.
이것은 혼자이고 싶었던 사람의 습관이기도 하다. 혼자 서려면, 일단 모든 것을 내 쪽으로 끌어와야 하니까.
다만 그 끌어옴이 자기책임이어야지, 자기비난이 되어서는 안 된다. 정말 버거운 날에는 한 발 물러나, 이건 내가 약해서가 아니라 그 자리가 원래 데미지를 발생시키는 구조라는 시선도 곁들여 둔다. 그 경계를 찾는 것이 아직 나의 숙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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