옆자리의 망설임
평소 자신 있어 보이던 그 사람이 — 한 박자 망설였다.
옆 조직의 리더였다. 다른 회의에서는 자기 안을 거의 발사하듯 말하던 사람. 그날따라 그 한 박자가 보였다. 안에서 이게 맞나가 한 번 지나가는, 내가 매일 보던 그 망설임.
그 망설임을 본 다음에 — 그 사람의 자신 있는 발화가 다르게 들리기 시작했다. 자신감이 아니었다. 자신감처럼 보이게 잘 다듬은 것이었다. 옆에서 보면 그 사람도 결정을 내리는 사람으로 보였을 것이고, 안에서는 — 어쩌면 — 매일 자기 다섯 줄을 들고 다녔을 것이다.
옆 회의실에도 같은 다섯 줄
그 자리에 도착하고 나서야 보이는 것이 있었다. 그 회의실에서 자신 있게 발화하던 모든 사람이 —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 자기 자리의 다섯 줄을 들고 있었다.
옆 조직 리더의 다섯 줄. 다른 부서 매니저의 다섯 줄. 디렉터의 다섯 줄. 모두 다른 다섯 줄이었지만 구조는 같았다. 이렇게 해도 되나, 저렇게 해도 되나, 어디까지가 내 범위인가, 내 역할이 정확히 뭔가, 그리고 이 목표가 정말 위가 원하는 건가.
다섯 줄을 입 밖에 꺼낸 사람이 없을 뿐이었다. 모두가 자기 다섯 줄을 안 보이게 들고 다녔다. 회의실은 안 보이는 다섯 줄들로 가득 차 있었다.
환경 데미지였다
그 풍경을 본 다음에야 한 가지가 다시 풀렸다.
내가 그 막막한 자리에서 받았던 데미지의 정체가 — 내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환경의 문제였다는 것. 좌표가 없는 자리에 떨어진 모든 사람에게 — 능력과 무관하게 — 같은 종류의 데미지가 들어간다. 나만 약해서 받은 데미지가 아니라, 그 자리가 원래 그 데미지를 발생시키는 구조인 것이다.
환경 데미지였다.
이 말이 가벼워 보일 수 있다. 안 그렇다. 통증을 내가 약해서 받은 통증으로 읽는 것과 환경이 발생시키는 통증으로 읽는 것은 — 같은 통증인데 완전히 다른 종류의 무게를 가진다. 전자는 자기 결함의 증거가 되고, 후자는 자기를 향한 자비의 근거가 된다.
보는 사람이 더 아프다
그 시기를 통과하면서 알게 된 것이 하나 더 있다. 유난히 못 견딘다고 느낄 때가 있는데, 사실은 유난히 명확하게 보고 있을 가능성이 더 크다.
보는 사람이 더 아프다.
같은 align 비용을 다른 사람도 보지만 매일 말하지 않을 뿐이다. 같은 막막함 속에 옆 조직도 있지만 일상의 톤으로 가공해서 보낼 뿐이다. 매번 안 보이는 방식으로 가공된다. 명확하게 본 사람만이 왜 가공된 것처럼 흘러가지에서 한 번 더 멈춘다.
명확하게 본 사람은 한 번 더 멈춘다. 그 한 번 더의 멈춤이 통증의 두께를 만든다. 그게 유난히 못 견디는 게 아니라 유난히 명확하게 보고 있는 자리다.
모두가 킹이었다
그래서 — 그 회의실의 모두가 킹이었다.
나만 킹인 줄 알았다. 알고 보니 옆자리도 킹이었다. 옆 조직 리더도 킹이었다. 디렉터도 자기 자리에서 킹이었다. 모두가 외부의 기대가 만든 가짜 영웅 자리에서 — 매일 자기 다섯 줄을 안 보이게 들고 다녔다.
킹의 진짜 위로는 이거다. 모르는 채로 결정 내리는 자리에 있는 게 너 혼자가 아니라는 것. 모두가 모름을 가공해서 회의에 들어왔고, 모두가 가공된 자신감 뒤에서 떨었고, 모두가 다음 결정 앞에서 능력치가 한 칸씩 깎이는 감각을 견뎠다.
그 자리는 그렇게 설계되어 있었던 것이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다.
다음 편 호출
여기까지 통과한 사람이 있다면 — 또는 지금 그 자리에 있는 사람이 있다면 — 마지막 편은 그 사람에게 보내는 편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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