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과물을 내기 위해 산 적이 없다
굴러 들어온 부산물
나는 결과물을 내기 위해 산 적이 없다. 궁금해서 읽었고, 읽다 보니 만들었고, 만들다 보니 몰랐던 것을 알게 됐다. 돈은 그 끝에서 굴러 들어온 부산물이었다. 그 시절 나는 아무것도 완성하지 않았지만 충분히 행복했다.
그런데 리더가 된 뒤로, 나는 그 순서를 거꾸로 살라는 요구를 받고 있다. 결과물을 먼저 그려서 사람들 손에 쥐여 주는 일. 요즘의 우울은 거기서 온다.
회사의 언어
회사를 탓할 수는 없다. 회사는 결과물과 성과를 내는 곳이다. 석 달 뒤, 여섯 달 뒤, 일 년 뒤에 우리는 무엇을 만들었는가. 그것이 어떤 이득을 가져오는가. 그 방향이 옳은가. 이 논의를 하려면 먼저 만들 것을 정의해야 한다. 결과물은 조직이 미래를 미리 이야기하기 위한 프로토콜이다. 필요하다는 것을 안다.
그런데 나는 미래를 미리 말해 본 적이 없다. 내가 도착한 곳들은 전부 걷다가 알게 된 곳이었다. 읽다 보니 여기까지 왔고, 만들다 보니 이것이 됐다. 그러니 석 달 뒤의 결과물을 지금 그리라는 말 앞에서 나는 더듬거린다. 아직 발견하지 않은 것을, 발견한 것처럼 말해야 해서다.
꺼내지 않으면 방향이 아니다
그러면 결과물 대신 방향을 쥐여 주면 되는가. 방향이라면 나도 원하는 것이다. 이틀 전에는 잠정 방향 하나를 적어 두기도 했다(말하면 만들어 주는 사람). 그런데 여기서 한 번 더 걸린다. 방향은, 모두가 같이 인지하고 동의하고 있는가.
혼자일 때 방향은 말이 필요 없었다. 궁금한 쪽으로 걸으면 그게 방향이었다. 그런데 여럿이 되는 순간 방향은 저절로 공유되지 않는다. 꺼내 놓지 않으면 각자 다른 곳을 보고 걷는다. 방향을 제대로 세우지 않으면, 사람들은 헤맨다.
언젠가 꺼내지 않으면 배운 게 아니라고 적었다(꺼내지 않으면, 배운 게 아니다). 방향도 같았다. 꺼내지 않으면, 방향이 아니다.
방향의 정밀도
방향이 있다는 말에도 층이 있다. 이를테면 우리에겐 이런 목표가 있다 — AI로 게임 개발을 잘하게 하기. 방향은 명확하다. 누구도 반대하지 않는다. 그런데 바로 그게 문제다. 누구도 반대할 수 없는 문장은, 아직 방향이 아니다.
이 일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코딩을 모르는 사람인가, 이미 잘 만들어 운영하고 있는 사람인가, 바이브코더인가. 같은 문장에 고개를 끄덕인 사람들이 여기서부터 다른 곳을 보고 걷는다. 방향에는 정밀도가 있다. 정밀도가 낮은 방향은 합의가 아니라 착시다 — 모두 같은 곳을 보고 있다는 착시.
조직의 시간
혼자일 때 헤매는 것은 배움이었다. 길을 잘못 들어도 잃는 것은 내 저녁뿐이었고, 그 저녁에도 대개 남는 게 있었다. 그런데 조직의 시간은 다르다. 열 사람이 한 달을 헤매면 열 달이 사라진다. 그것도 남의 인생에서.
그래서 어디에 모여 달릴지는 명확해야 한다. 단 하나의 오해도 살아남지 못하게, 모두가 똑같이 이해하고 달릴 수 있게. 기준이, 규칙이, 용어가 통일되어야 한다(팀 프로토콜을 정의하는 법).
북극성과 발밑
그런데 문장을 통일해도 끝이 아니다. 사람들이 서 있는 자리가 다르기 때문이다. 북극성은 하나고, 명확하다. 그러나 언덕에 선 사람은 내려가야 하고, 골짜기에 선 사람은 올라가야 한다. 같은 별을 보고도 첫걸음은 반대다.
방향을 공유한다는 건 별을 가리키는 일이 아니었다. 각자의 발밑에서 그 별이 어느 쪽인지, 함께 확인하는 일이었다.
번역
여기까지 적고 나서야 이 일의 이름을 알겠다. 번역이다. 하고자 하는 것을 말로 옮겨서, 서로에게 통하게 하는 일. 하나의 방향을 사람 수만큼의 다음 걸음으로 옮기는 일.
누구를 위한 것인가. 그 사람은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 그 사람의 문제는 무엇인가 — 이 질문들은 낯설지 않다. 배운 것으로 다른 사람의 문제를 푸는 일. 내가 평생 가장 즐거워한 일이 그것이었다.
이름을 알았다고 우울이 걷히지는 않는다. 석 달 뒤의 결과물을 그리는 일은 여전히 어색하고, 당분간 어색할 것이다. 다만 미래를 맞히는 일은 못 해도, 사람들의 발밑을 묻고 각자의 자리에서 별이 어느 쪽인지 함께 확인하는 일이라면 — 그것은 내가 즐거워하던 일과 그리 멀지 않다.
이번에도, 걷다가 알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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