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dePoet / Essay

결과물을 내기 위해 산 적이 없다

궁금해서 읽고 만들다 보니 배웠고, 돈은 그 끝에서 굴러 들어온 부산물이었다. 그런데 리더가 되니 석 달 뒤의 결과물을 미리 그려 쥐여 주는 일이 왔다. 회사를 탓할 수는 없다 — 결과물은 조직이 미래를 이야기하는 프로토콜이니까. 그러면 방향을 주면 되는가. 방향에는 정밀도가 있었다. 누구도 반대할 수 없는 문장은 아직 방향이 아니고, 북극성이 하나여도 발밑이 다르면 첫걸음은 반대다. 하나의 방향을 사람 수만큼의 다음 걸음으로 옮기는 일 — 그 이름은 번역이었다.
2026-07-03 · 2회 읽음
방향결과물리더십정밀도우울

굴러 들어온 부산물

나는 결과물을 내기 위해 산 적이 없다. 궁금해서 읽었고, 읽다 보니 만들었고, 만들다 보니 몰랐던 것을 알게 됐다. 돈은 그 끝에서 굴러 들어온 부산물이었다. 그 시절 나는 아무것도 완성하지 않았지만 충분히 행복했다.

그런데 리더가 된 뒤로, 나는 그 순서를 거꾸로 살라는 요구를 받고 있다. 결과물을 먼저 그려서 사람들 손에 쥐여 주는 일. 요즘의 우울은 거기서 온다.

회사의 언어

회사를 탓할 수는 없다. 회사는 결과물과 성과를 내는 곳이다. 석 달 뒤, 여섯 달 뒤, 일 년 뒤에 우리는 무엇을 만들었는가. 그것이 어떤 이득을 가져오는가. 그 방향이 옳은가. 이 논의를 하려면 먼저 만들 것을 정의해야 한다. 결과물은 조직이 미래를 미리 이야기하기 위한 프로토콜이다. 필요하다는 것을 안다.

그런데 나는 미래를 미리 말해 본 적이 없다. 내가 도착한 곳들은 전부 걷다가 알게 된 곳이었다. 읽다 보니 여기까지 왔고, 만들다 보니 이것이 됐다. 그러니 석 달 뒤의 결과물을 지금 그리라는 말 앞에서 나는 더듬거린다. 아직 발견하지 않은 것을, 발견한 것처럼 말해야 해서다.

꺼내지 않으면 방향이 아니다

그러면 결과물 대신 방향을 쥐여 주면 되는가. 방향이라면 나도 원하는 것이다. 이틀 전에는 잠정 방향 하나를 적어 두기도 했다(말하면 만들어 주는 사람). 그런데 여기서 한 번 더 걸린다. 방향은, 모두가 같이 인지하고 동의하고 있는가.

혼자일 때 방향은 말이 필요 없었다. 궁금한 쪽으로 걸으면 그게 방향이었다. 그런데 여럿이 되는 순간 방향은 저절로 공유되지 않는다. 꺼내 놓지 않으면 각자 다른 곳을 보고 걷는다. 방향을 제대로 세우지 않으면, 사람들은 헤맨다.

언젠가 꺼내지 않으면 배운 게 아니라고 적었다(꺼내지 않으면, 배운 게 아니다). 방향도 같았다. 꺼내지 않으면, 방향이 아니다.

방향의 정밀도

방향이 있다는 말에도 층이 있다. 이를테면 우리에겐 이런 목표가 있다 — AI로 게임 개발을 잘하게 하기. 방향은 명확하다. 누구도 반대하지 않는다. 그런데 바로 그게 문제다. 누구도 반대할 수 없는 문장은, 아직 방향이 아니다.

이 일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코딩을 모르는 사람인가, 이미 잘 만들어 운영하고 있는 사람인가, 바이브코더인가. 같은 문장에 고개를 끄덕인 사람들이 여기서부터 다른 곳을 보고 걷는다. 방향에는 정밀도가 있다. 정밀도가 낮은 방향은 합의가 아니라 착시다 — 모두 같은 곳을 보고 있다는 착시.

조직의 시간

혼자일 때 헤매는 것은 배움이었다. 길을 잘못 들어도 잃는 것은 내 저녁뿐이었고, 그 저녁에도 대개 남는 게 있었다. 그런데 조직의 시간은 다르다. 열 사람이 한 달을 헤매면 열 달이 사라진다. 그것도 남의 인생에서.

그래서 어디에 모여 달릴지는 명확해야 한다. 단 하나의 오해도 살아남지 못하게, 모두가 똑같이 이해하고 달릴 수 있게. 기준이, 규칙이, 용어가 통일되어야 한다(팀 프로토콜을 정의하는 법).

북극성과 발밑

그런데 문장을 통일해도 끝이 아니다. 사람들이 서 있는 자리가 다르기 때문이다. 북극성은 하나고, 명확하다. 그러나 언덕에 선 사람은 내려가야 하고, 골짜기에 선 사람은 올라가야 한다. 같은 별을 보고도 첫걸음은 반대다.

방향을 공유한다는 건 별을 가리키는 일이 아니었다. 각자의 발밑에서 그 별이 어느 쪽인지, 함께 확인하는 일이었다.

번역

여기까지 적고 나서야 이 일의 이름을 알겠다. 번역이다. 하고자 하는 것을 말로 옮겨서, 서로에게 통하게 하는 일. 하나의 방향을 사람 수만큼의 다음 걸음으로 옮기는 일.

누구를 위한 것인가. 그 사람은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 그 사람의 문제는 무엇인가 — 이 질문들은 낯설지 않다. 배운 것으로 다른 사람의 문제를 푸는 일. 내가 평생 가장 즐거워한 일이 그것이었다.

이름을 알았다고 우울이 걷히지는 않는다. 석 달 뒤의 결과물을 그리는 일은 여전히 어색하고, 당분간 어색할 것이다. 다만 미래를 맞히는 일은 못 해도, 사람들의 발밑을 묻고 각자의 자리에서 별이 어느 쪽인지 함께 확인하는 일이라면 — 그것은 내가 즐거워하던 일과 그리 멀지 않다.

이번에도, 걷다가 알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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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은 신호였다될지 안 될지 모르는 일을 기한 안에 해내야 하는 요즘, 가장 고약한 건 모르는 걸 모르는 상태였다. 사람에게는 AI에 없는 센서가 있다 — 감정이다. 화남·슬픔·억울함·감동은 내가 모르던 무언가가 근처에 있다는 신호이고, 모델이 loss로 배우듯 사람은 감정으로 모름을 감지한다. 감정을 신호로 읽기 시작하자 마음의 힘듦과 해야 할 일·해야 할 말이 갈라졌다 — 재촉하는 사람의 불안도 같은 신호였다. 그리고 사람도 환각한다 — 모른다는 걸 모른 채 아는 해법으로 문제의 본질을 덮는다. 부딪혀야 신호가 온다.이제부터 나는 최맹보다홍명보가 화면에 'FIGHT' 한 단어만 띄우고 '싸워'를 반복하던 국가대표팀 다큐 장면이 밈이 됐다. 웃다가 뜨끔했다 — 명확한 결과물이 안 그려질 때 나도 팀 앞에 큰 그림 하나 걸어놓고 '싸워'라고 하고 있었으니까. 개발자로 살던 내가 리더가 되며 나를 버렸다. 홍명보가 2024년 취임 회견에서 '저는 저를 버렸습니다'라고 했던 것처럼(2014년엔 '대한민국이 날 버렸어'라며 버림받은 쪽이었지만). 옳게 짜인 구조보다 리소스 효율·목적·결과물로 판단하는 자리로 옮기자, 오래 나를 붙들던 꺼림칙함이 남았다 — 이거 이렇게 해도 되나. 분류학을 들여다보다 그 정체를 알았다. 그 불편함은 코드에 새겨진 진실이 아니라, 여러 자리의 시각을 한꺼번에 켜둔 채 아직 어느 축으로 결정할지 못 정한 상태에서 나는 잡음이었다. 이걸로도 되고 저걸로도 되는데 한쪽이 공수가 더 들면 동작하는 걸로 간다. 장기적 문제는 다른 축이 던지는 질문이고, 이 규모·이 시점 축에선 답이 이미 나와 있다. 다만 어떤 꺼림칙함은 잡음이 아니라 진짜 신호다 — 그 둘을 가려내는 게 지금 내 숙제다.뿌옇게 읽어도 된다룰루 밀러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를 《죽음의 수용소에서》·《무엇이 내 인생을 만드는가》와 나란히 읽었다. 낯선 책이 뿌옇게 읽히는 게 오래 내 탓인 줄 알았는데, 독서는 완성된 영화가 아니라 문장이 올 때마다 흐릿한 모형을 고쳐 짓는 일이었다. 완모식표본은 종의 모범생이 아니라 이름이 떠내려가지 않게 박은 닻이고, 임베딩·클러스터링도 같은 일을 한다 — 기준이 지도를 만든다. 그러다 알았다. 개발자로 살다 막 리더가 된 내가 매일 하는 일이 이거였다는 걸. 모르는 걸 실패로 오역해 화가 났고, 그 화는 실은 경계의 신호였고, 프랑클이 말한 유머로 반 뼘 올라서니 나를 화나게 한 사람 얼굴에 내 얼굴이 겹쳤다. 분류는 세상 그 자체가 아니라, 어떤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 특정 관점에서 그린 임시적인 지도다.
dev · 2026. 9.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