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부터 나는 최맹보다
FIGHT, 싸워
화면에 단어 하나가 떠 있었다. FIGHT. 감독은 그 앞에서 말했다. 다 알지? 싸워. 오늘 경기장 나와서 싸워. 순간순간마다 싸워. 선수들은 무표정하게 들었다.
월드컵에서 지고 돌아온 뒤, 그 장면이 온 나라의 밈이 됐다. 산림청까지 산불 현장 나가서 불이랑 싸워를 올렸다.
나도 웃었다. 한참 웃다가 — 어, 근데 나 지금 저거 아닌가?
팀원들한테도 말했다. 나 요즘 딱 홍명보라고. 명확한 결과물이 안 그려질 때, 나도 큰 그림 하나 걸어놓고 싸워라고 하고 있었으니까. 방향이라고 부르면서, 실은 정답을 못 줘서. 정답 대신 투지를 건네는 사람. 웃긴데, 웃고 나니 조금 뜨끔했다.
그래서 인정하기로 했다. 이제부터 나는 최맹보다.
저는 저를 버렸습니다
찾아보니 홍명보 안에는 버림이 두 방향으로 있었다.
2014년, 브라질에서 지고 돌아와 사석에서 그랬다더라. 대한민국이 날 버렸어. 버림받은 쪽이다. 그리고 2024년, 다시 대표팀을 맡으며 취임 회견에서 말했다. 저는 저를 버렸습니다. 이제 저는 없습니다. 대한민국 축구밖에 없습니다. 이번엔 스스로 버린 쪽이고.
두 번째 문장 앞에서 멈칫했다. 내가 요즘 속으로 하던 말이 딱 그거였으니까. 나는 나를 버렸다.
개발자를. 엔지니어를. 옳게 짜인 구조, 깔끔한 추상, 나중에 후회 안 할 설계 — 그걸 제일 위에 두고 모든 걸 재던 사람을, 심판석에서 내렸다. 그 자리엔 사업을 앉혔다. 리소스를 어디에 얼마나 쓰나, 지금 목적이 뭐냐, 이번에 뭘 내놓아야 하나. 이제 그 축으로 판단하고 그 축으로 움직인다.
말해놓고 보니 배신 같다. 오래 나였던 것에 대한. 그런데 홍명보의 그 문장도 실은 배신이 아니라 각오였다. 더는 내 취향으로 안 고르겠다, 이길 수 있는 걸 고르겠다. 나도 그 각오를 하고 있었다.
꺼림칙함의 정체
각오를 했는데도 안에서 자꾸 야유가 났다.
이걸 이렇게 질러도 되나. 나중에 문제 되지 않나. 이건 옳은 방식이 아닌데. 개발자로 오래 선명했던 사람일수록 그 야유는 세다 — 원래 다 답이 있던 자리였으니까. 나는 그 꺼림칙함을 오래 옳음의 신호로 알고 살았다. 찜찜하면 뭔가 틀린 거라고.
그러다 뜻밖의 데서 답을 주웠다. 요즘 분류학을 들여다보고 있었는데(얼마 전에도 이 이야기를 적었다), 거기서 걸렸다. 같은 걸 어떻게 나누느냐는 보는 자리마다 다르다는 것. 결제 하나도 기술로 나누면 프론트·API·DB, 사업으로 나누면 매출·비용·리스크, 운영으로 나누면 장애·정산. 어느 게 진짜 결제냐 물으면 답이 없다. 각각 다른 질문에 답하고 있으니까.
그제야 그 꺼림칙함의 정체가 보였다. 그건 코드에 새겨진 진실이 아니었다. 여러 자리의 시각을 한꺼번에 켜놓고, 아직 어느 축으로 결정할지를 안 정한 상태 — 거기서 나는 잡음이었다. 엔지니어 축에선 찜찜한 게, 사업 축에선 멀쩡히 옳을 수 있다. 두 지도를 겹쳐 든 채 하나로 못 포개서 어지러웠던 거지, 세상이 나한테 경고를 보낸 게 아니었다.
모르는 걸 모르는 채로 분류하려니 생긴 어지럼증이었다. 축을 하나 고르면 가라앉는.
이걸로도 되고 저걸로도 된다
그걸 알고 나니 매일 하던 결정이 가벼워졌다.
어떤 기능이 있다. 이걸로도 동작하고 저걸로도 동작한다. 그런데 한쪽이 손이 더 간다. 예전 같으면 여기서 오래 붙들렸다 — 어느 쪽이 더 옳은 구조인가. 지금은 짧다. 동작하는 걸로 간다. 동작할 거니까.
나중에 장기적으로 문제 될 수 있다 — 그 말엔 나도 동의한다. 진심으로. 하지만 그건 다른 축이 던지는 질문이다. 나는 지금 사업이 돌아가는 구조를 본다. 이 규모, 이 시점에선 저게 동작한다. 그 축 위에서는 답이 이미 나와 있다. 문제가 진짜로 커지는 규모까지 이 사업이 간다면 — 그건 그때의, 훨씬 행복한 고민이다(그런 걱정은 아직 오지 않은 손님 걱정이라고 적어둔 적이 있다).
이게 나를 버린다는 것의 실물이다. 거창한 선언이 아니라, 아까 그 갈림길에서 예전의 나라면 못 넘어갔을 데를 그냥 넘어가는 것.
그래도 나는 "싸워"라고 한다
그러니 돌고 돌아, 나는 결국 화면에 FIGHT 띄우고 싸워라고 하는 사람이 맞다.
근데 반 뼘만 올라서서 보면, 그게 꼭 틀린 말도 아니다. 리더가 매 순간 명확한 결과물을 손에 쥐고 있다는 것 — 그게 애초에 환상이었는지도 모른다. 다 그려지지 않은 채로 방향만 걸어두고, 나머지는 같이 싸워 채워가는 것. 어쩌면 홍명보는 몰라서 싸우라고 한 게 아니라, 다 알 수는 없다는 걸 알아서 싸우라고 한 걸지도. (아니면 이건 내 자기합리화고. 둘 다일 수도 있다.)
다만 하나는 접어두지 않는다. 나는 엔지니어를 지운 게 아니라 관중석으로 옮겼을 뿐이다. 야유는 계속 들린다. 그리고 그중 어떤 야유는 진짜 신호다. 축을 안 정해서 나는 잡음이 아니라, 정말 여기가 벽이라고 알려주는 소리. 그 둘을 가려내는 것 — 모든 걸 내 안으로 당기되 그 경계를 찾는 게 숙제라고 적은 적이 있는데, 딱 그 경계가 여기서도 숙제다.
홍명보의 결말은 이미 나왔다. 탈락, 사퇴, 그리고 밈. 최맹보의 결말은 아직 안 나왔다. 일단은 이 축으로 한번 살아보기로 한다. 살아보고 아니면, 그때 또 고쳐 그리면 된다. 이 지도도 완성본은 아니니까.
나는 나를 버린 게 아니라, 무엇으로 결정할지를 골랐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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