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dePoet / Essay

누가 먼저 가야 하나 — 가운데서 순서를 보는 일

에이전트에게 일을 최대한 시키려고 작업을 잘게 나눠 세션별로 병렬로 돌리다 보면, 나중에 보니 서로 부딪쳐 있다. 필요한 건 더 좋은 규칙이 아니라 가운데서 종속성을 보고 '이거 먼저' 하고 순서를 잡아 주는 자리 — 회사에서 부서와 부서 사이에 내가 서 있던 바로 그 자리였다. 초기엔 반드시 필요하고 체계가 잡히면 줄어드는 일. 에이전트에게도 같은 자리가 비어 있다는 기록.
2026-09-20
AIagentdependencyorchestrationteamR&R

병렬로 마구 시켰다

에이전트에게 일을 최대한 시키고 싶었다. 그래서 작업을 이것저것 나눴다. 세션을 따로 열고, 한 놈은 이것, 한 놈은 저것, 병렬로 마구 돌렸다. 손이 여럿이면 그만큼 빨라질 줄 알았다.

나중에 열어 보면 부딪쳐 있었다. 한쪽이 전제로 삼은 걸 다른 쪽이 바꿔 놓았고, 먼저 끝났어야 할 일이 뒤에 와 있었다. 각자는 열심히 했는데, 합쳐 놓으면 꼬였다.

처음엔 나누는 방식이 서툴러서 그런 줄 알았다. 더 잘게, 더 깔끔하게 나누면 되겠지. 몇 번을 다시 나눠도 같은 자리에서 같은 일이 났다. 나누는 게 문제가 아니었다.

가운데서 보는 눈

빠져 있던 게 뭔지 한참 뒤에 보였다. 각자 하는 작업을 어디선가 지켜보고 있다가 — 아, 이거 종속성 꼬였네. 이거 먼저 하고 저거 하는 게 맞는데 — 하고 알아채는 눈. 그리고 그 자리에서 손을 들어 몇 놈을 멈춰 세우고, 순서대로 다시 풀어 주는 손.

에이전트 하나하나는 자기 일만 본다. 자기 세션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모른다. 그건 잘못이 아니다. 그렇게 생겨먹은 것이다. 그러니 누군가는 밖에서 전체를 봐야 한다. 규칙을 더 정교하게 적어 준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가운데 서는 자리가 비어 있었다.

돌아보니 내 일이었다

그 자리를 떠올리다가 멈칫했다. 이거, 내가 회사에서 하는 일이잖아.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도 이 일은 엄청나게 잦다. 내가 보고 있다가 — 아, 이 일은 저 부서에서 먼저 해야 우리가 할 수 있네. 이건 우리 부서가 하고 나서 저 부서가 이어받아야 하네 — 하고 순서를 잡는다. 각자의 종속성이 보이게 만들고, 그 순서대로 일이 돌아가게 한다. 그래야 여럿이 동시에 움직이면서도 가장 빠른 시간 안에 끝난다. 동시다발은 순서가 보일 때만 빠르다.

아무리 프로세스를 잡고 규칙을 세워도 초기에는 이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더라고. R&R이 모호하고, 이 일이 어디로 흘러갈지 아무도 모르는 구간. 거기서는 규칙이 아니라 사람이 순서를 본다. 그리고 어느 정도 체계가 잡히면 이 일은 줄어든다. 줄어드는 게 정상이다. 그때까지 누군가 그 자리에 서 있어야 한다는 게 핵심이다.

에이전트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지금 우리는 에이전트와 일하는 초기 구간에 있다. R&R은 모호하고, 작업이 어떻게 흘러갈지 모른다. 그러니 그 자리가 필요하다. (📝 하네스를 짜다가 같은 주에 사람 조직에서 같은 원리를 발견했던 글과 이어진다. 그때는 위임과 방임의 차이였고, 이번엔 순서였다.)

아직 못 본 것

이런 서비스를 아직 못 본 것 같다. 에이전트를 여럿 굴리는 도구는 많은데, 그 사이에 서서 종속성을 읽고 멈췄다가 순서대로 재개시키는 것 — 그 자리를 맡겠다는 물건은 눈에 띄지 않는다. 다들 각자의 에이전트를 더 똑똑하게 만드는 데 바쁘다. 내가 겪은 건 똑똑함의 문제가 아니었는데.

이게 엄청 필요할 거라는 감이 온다. 나한테 필요했으니까. (📝 내가 만든 도구는 전부 처음엔 내가 필요해서 만든 것이었다는 걸 이미 한 번 적었다.)

적어 둔다

codepoet에 하나 만들고 싶다. 아니면 따로 만들어서 팔아 볼까 — 팔릴지는 솔직히 애매하다. 만들어 파는 게 되는 종류의 물건인지 아직 모르겠다.

그래서 일단 적어 둔다. 지금 보이는 건 이것뿐이다. 각자 열심히 하는 손들 사이에, 순서를 보는 눈 하나. 회사에서 내가 서 있는 자리와 같은 자리가, 에이전트들 사이에도 비어 있다.

누가 먼저 가야 하나. 그걸 보는 게 아직은 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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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임이 아니라 위임 — AI 하네스를 짜다가AI 오케스트레이션 하네스의 좋고 나쁨을 가리는 두 축. 그러다 같은 주에, 같은 원리가 사람 조직의 작업 분장에서도 발견됐다.공책에 그린 보드게임재미이론이라는 책을 붙들고 좋아했던 게임들을 줄줄이 적다가, 내가 왜 배우는 게 재밌는지를 묻게 됐다. 지난 글들을 다시 펼치고 나서야 장면 하나가 떠올랐다 — 어릴 때 공책에 칸을 긋고 만든 보드게임을 누군가와 같이 하던 때. 평생 찾던 기쁨이 거기 있었다. 개발자가 되는 건 그 공책을 넓히려던 손이었고, AI 덕에 공책이 다시 내 손에 돌아왔다. 만드는 기술을 배우는 재미는 AI가 가져갔지만, 사람이라는 끝없는 판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오래 붙든 콘텐츠는 하나같이 무언가를 가르쳐 줬다 — 누군가 그걸 깨닫고 웃는 얼굴을 보는 것, 그게 충만감이었다.그만두고 싶은 이유를 세어 보았다리더를 그만두고 싶다는 마음이 올해 내내 있었다. 디렉터와 이야기하기 전에 그 이유를 하나씩 세어 보았다. 가운데 낀 양가감정, 실무를 못 하는 우울, 줄 수 있는 게 칭찬뿐인 손, 끝이 없는 목표, 정해지지 않은 AI 사용료. 아무나 할 수 있게 해 주는 건 저점을 올리는 일이지 고점을 올리는 일이 아니라는 것도 보였다. 세다 보니 이유들이 한 곳을 가리켰다 — 일은 한데 모였는데, 일하는 판은 각자 하던 때 그대로였다. 하소연 말고 가안 한 장을 들고 가기로 한다. 그만두고 싶은 마음은 그대로인 채로. 다시 읽고서야 R&R은 어떻게 짜든 부딪힌다는 것, 가장 큰 빈칸은 내 기준이었다는 것이 보였다.
v2026.10.31.1 · 2026. 11.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