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만두고 싶은 이유를 세어 보았다
리더를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이 계속 든다.
지난번엔 겨우 꺼내 놓기만 했다. (📝 일 잘하던 팀원이 나간다는 말에 부럽다가 먼저 왔던 날.) 꺼내 놓으니 이번엔 다른 질문이 따라왔다. 왜. 그만두고 싶은 이유가 정확히 뭔지, 나는 말할 수 있나.
심리상담을 다닌다. 수영장도 다닌다. 물속에 있는 동안은 생각이 끊겨서 좋다. 나오면 다시 이어진다.
곧 디렉터와 이야기할 자리가 있다. 그 자리에서 내 감정만 쏟고 나오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세어 보기로 했다.
하나, 가운데
디렉터가 원하는 방향은 머리로는 이해된다. 왜 지금 그쪽이어야 하는지도 안다.
그런데 아래로 돌아서면 다른 그림이 있다. 다 같이 하자고 하는데 계속 딴 방향을 보는 사람이 있다. 그러면 내가 들어간다. 한 명 한 명에게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지 말해 준다. 그사이 어디선가 일이 부딪힌다. 다시 들어가서 중재한다. 하루가 그렇게 간다.
위의 말을 이해하는 나와, 아래의 사정을 아는 나. 둘 다 맞아서 어느 한쪽에 설 수가 없다.
양가감정이었다.
둘, 실무
나는 실무자였다. 손으로 만들고, 만든 게 돌아가는 걸 보는 게 좋아서 여기까지 왔다.
지금은 실무를 할 틈이 없다. 회의와 중재 사이에 한 줄이라도 짜 보려고 하면 다음 일이 온다. 그러다 보니 손이 비었다. 손이 비니까 마음도 가라앉았다.
우울의 한 갈래는 여기서 오는 것 같다. 리더 일이 싫은 게 아니라, 만드는 사람이었던 내가 사라진 것 같아서.
셋, 줄 수 있는 것
조직이 원하는 방향과 다르게 계속 일하는 사람이 있다. 처음엔 마음에 안 든다고 적으려다 멈췄다. 그 말은 아니다. 사람이 싫은 게 아니다. 같이 일하는 게 불편해지는 거다.
그 사람을 따로 떼어 분리된 일을 줄 수도 있다. 같이 가려면 행동이 바뀌어야 한다. 말로는 잘 안 바뀌었다. 몇 번 해 보고 나니 가장 빠른 건 보상 같았다. 바뀌면 그만큼 돌아가는 게 있어야 사람이 움직인다.
그런데 보상은 내 마음대로 줄 수 없다. 평가는 조직 차원에서 하고, 그 위에 실이 있다. 내가 줄 수 있는 건 인정이다. 잘하고 있다는 말, 사람들 앞에서 이름을 불러 주는 것. 명예와 인정 욕구는 어느 정도 채워 줄 수 있다.
해 보니 거기에 한계가 있었다. 말로 하는 인정은 금방 닳았다. 그리고 인정을 주면 줄수록 모두가 그걸 두고 겨루기 시작했다. 끝이 없는 경쟁이 되어 갔다.
한 가지가 더 보였다. 자율적으로 하자고 해도, 결국 나는 이 판을 책임지는 사람에게 맞춰 일하는 사람을 높이 볼 수밖에 없었다. 그게 되는 사람이 있고 안 되는 사람이 있다. 자율이라고 말하면서 실은 맞춤을 평가하고 있었던 거다.
넷, 판이 바뀌었다
우리 팀은 원래 각자 자기 연구를 하던 곳이었다. 올해 초엔 두 갈래로 나눠 일했다. 그러다 하반기에 한 제품으로 모두 모였다.
한곳에 여럿이 모이니 부딪혔다. 팀 안에서도 말이 많았는데, 다른 조직에서 온 사람들까지 붙었다. 그 사람들도 하던 일이 하루아침에 바뀌어 같은 제품을 만들게 된 거였다. 그쪽은 그쪽대로 얼마나 정신이 없을까.
실무자 자리에서 보면 — 원래 일하던 방식이 있다. 그게 하루아침에 바뀌지 않는다. 나도 그렇다. 나도 아직 내가 일하던 방식을 못 버렸다.
그래서 딴 방향을 보던 사람들이 조금 다르게 보였다. 그 사람들이 갑자기 엉뚱해진 게 아니었다. 어제까지 맞던 방식으로 오늘도 일하고 있었던 거다. 바뀐 건 사람이 아니라 판이었다. (📝 회의실의 모두가 킹이었던 날도, 그 자리가 그렇게 설계되어 있었다.)
다섯, 끝이 없는 목표
지난 마감을 넘기고 나니 이번엔 초격차라는 말이 내려왔다. 크게 앞서 가자는 말이다. 그런데 무엇을 만들면 초격차인지는 아직 모르겠다. 똑같이 또 3D로 밀어붙이는 거라면 — 그 스트레스를 다시 견딜 수 있을지 자신이 없다.
둘러보니 이미 그런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누군가는 재미를 찾겠다고 했다. 좋은 말이다. 그런데 언제 찾았다고 할 수 있나. 끝이 없는 목표였다. 끝이 없으니 끝낼 수도 없고, 끝낼 수 없으니 잘했다고 말해 줄 수도 없다.
3D도 마찬가지였다. 디렉터가 원하는 게 뭔지, 나는 아직 이해를 못 했다. 작업 결과로 무엇이 만들어져야 하는지를 모른다.
그걸 붙들고 있다 보니 하나가 갈라져 보였다. 우리가 만들어 줄 수 있는 건 환경이다. 도구를 깔고, 길을 닦고, 누구나 거기까지는 오게 하는 것. 그런데 그 위에서 무엇을 그려 내느냐는 파일럿의 솜씨다. 그건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다. 사실 AI 도구 하나와 그걸 다룰 줄 아는 사람 하나면, 꽤 많은 걸 다 할 수 있다.
아무나 할 수 있게 해 주는 건 저점을 올리는 일이지, 고점을 올리는 일이 아니었다.
초격차가 고점의 이야기라면, 환경을 아무리 닦아도 거기엔 닿지 않는다. 저점의 이야기라면 할 수 있다. 다만 그 환경을 위해 비용을 얼마나 감수할지는 또 다른 이야기다. 어느 쪽인지 모르는 채로 다들 뛰고 있었다.
여섯, 사용료
비용도 있다. AI 도구 사용료.
쓰는 양이 사람마다 크게 다르다. 기준을 세워서 일괄로 막으면 깔끔하겠다 싶다가도 멈칫한다. 작업마다 성격이 다르다. 많이 써야 나오는 일이 있고, 조금만 써도 되는 일이 있다. 같은 한도를 걸면 많이 써야 하는 일이 먼저 숨을 못 쉰다. 비용을 줄이려다 성과를 깎을 것 같았다.
그렇다고 그냥 두면 매번 내가 들여다봐야 한다. 이것도 결국 누가 무엇에 얼마까지가 정해지지 않은 빈칸이었다.
일곱, 나보다 더
그만두고 싶다고 말하려다가 또 멈추게 되는 이유가 있다.
디렉터는 나보다 더 힘들 거다. 곁의 다른 리더들도 다들 버거워 보인다. 몸이 상한 사람도 있다. 새로 합류한 조직을 이끄는 사람도 쉽지 않을 거다.
다 같이 대격변 한가운데 있다. 그걸 알아서, 내 힘듦을 꺼내는 게 투정 같았다. 힘든 사람에게 힘들다고 말하는 게 미안했다.
세어 보니
일곱을 늘어놓고 한참 봤다. 가장 큰 주제가 뭘까. R&R일까. 각자 일을 주는데 계속 부딪히는 것. 일을 내 마음대로 줄 수 없는 것. 일이 확 바뀌어서 따라오기 버거운 사람들.
하나씩 짚다 보니, 일곱이 따로 노는 게 아니었다.
딴 방향을 보는 사람도, 매일의 중재도, 줄 게 칭찬뿐인 손도, 끝이 없는 목표도, 정해지지 않은 사용료도 — 다 같은 데서 나오고 있었다. 일은 한 제품으로 모였는데, 무엇이 끝인지, 누가 무엇을 맡고, 누가 정하고, 잘한 걸 무엇으로 돌려주는지는 각자 연구하던 때 그대로였다. 그 빈자리를 내가 몸으로 메우고 있었다. 한 명씩 찾아가 말해 주고, 부딪히면 끼어들고, 줄 게 없으니 말로 채우고.
일은 한데 모였는데, 일하는 판은 각자 하던 때 그대로였다.
R&R은 그 판의 한 조각이었다. 그리고 판은 내가 혼자 다시 짤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러니 디렉터에게 들고 갈 건 내 감정이 아니라, 판을 어떻게 다시 짤지에 대한 가안이었다.
지난번에 적어 두었다. 모호한 지시 앞에서 답답해할 게 아니라 기대하시는 결과가 이건가요 — 내가 먼저 되물어야 한다고. 이번이 그 차례다.
가안 한 장
아직 다듬는 중이지만, 일단 이렇게 들고 가 보려 한다. 맨 위 질문은 하나다. 이런 방향으로 고쳐 나가도 되겠습니까.
- 끝이 있는 목표로 — 끝이 없는 목표는 할 수 있는 일로 바꾼다. 초격차가 무엇을 만들어 내는 건지 여쭤 본다. 고점의 이야기인지, 저점의 이야기인지. 환경은 우리가 만들 수 있지만 솜씨는 그렇지 않다는 것까지.
- 나누기 — 한 제품 안에서 주제별로 실무자들이 모인다. 주간 회의는 너무 멀어서, 매일 짧게 얘기한다. 자리도 붙인다. 지금 분장도 끝이 있는 목표 기준으로 다시 고친다. (곁의 리더와는 이미 이쪽으로 이야기를 나누며 맞춰 가는 중이다.)
- 따로 할 일과 같이 할 일 — 같이 가기 어려운 사람에게는 처음부터 떨어진 일을 준다. 억지로 한 판에 넣지 않는다.
- 돌려줄 것 — 칭찬 말고 내가 줄 수 있는 게 무엇인지, 디렉터와 범위를 정한다. 내가 근거를 모아 올리면 평가에 실리는지, 일을 고를 권한 같은 걸 쥘 수 있는지.
- 사용료 — 한 줄로 막지 않고, 작업 성격마다 얼마까지를 정한다. 넘을 땐 이유를 남기면 되게. 성과를 깎지 않고, 매번 묻지 않아도 되게.
- 내 자리 — 리더 일만 할지, 실무를 얼마나 남길지. 그리고 이 자리를 언제까지 할지.
마지막 줄을 적는 데 오래 걸렸다. 적고 나니 조금 가벼워졌다. 그만두고 싶다는 마음도 결국 판의 한 칸이었다. 내 자리를 어떻게 둘지도 같이 정할 수 있는 거였다.
그 칸을 들여다보다가 하나가 더 보였다. 언제 가장 행복했나. 코드를 짤 때도 행복했다. 그런데 가장 또렷한 장면은 따로 있었다. 많은 사람 앞에서 내 생각이 이래요 하고 꺼내 놓던 날. 이렇게 글로 적어 건네는 밤.
나는 전달하는 순간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실무를 못 해서 우울하다고 적었는데, 어쩌면 순서가 반대였는지도 모른다. 코드를 못 짜서가 아니라, 무언가를 만들어 건네는 일을 못 해서. 그렇다면 내 자리 칸에 적을 말도 조금 달라진다. 리더냐 실무자냐가 아니라 — 건네는 사람으로 남을 수 있느냐.
다시 읽다가
며칠 뒤, 이 글을 다시 읽었다.
가안의 칸들을 하나씩 다시 짚어 봤다. 주제별로 나누면 주제 사이가 부딪힌다. 사람별로 나누면 사람 사이가 부딪힌다. 위에서 정해 주면 아래가 못 따라오고, 아래에 맡기면 위와 어긋난다. 어떻게 짜도 어딘가 하나는 부딪혔다.
R&R은 어떻게 짜든 문제가 되는구나.
그럼 무엇이 문제였나. 한참 보다가 겨우 적었다.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내 기준이 아직 없었다.
정답지를 쥐고 있었다면 쉬웠을 거다. 내 답과 다르면 이렇게 해야 합니다라고 말하면 된다. 위의 답이 맞다고 보면 거기 맞춰 일하면 된다. 그런데 나는 어느 쪽도 아니었다. 말하지도 못하고, 맞추지도 못하고. 첫 장에 양가감정이라고 적었던 자리가 거기였다.
이도 저도 아닌 내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거다.
그 마음을 판에 돌리고, 위에 돌리고, 딴 방향을 보는 사람에게 돌렸다. 일곱 가지 중 몇은 분명 판의 문제가 맞다. 그래도 그렇게 열심히 세게 만든 건 — 이도 저도 아닌 나를 마주하기 싫은 마음이었는지도 모른다. 돌아보니 순서가 반대였다. 판이 그대로라서 내가 흔들린 게 아니라, 내 기준이 없으니 어떤 판도 버거웠다.
부끄러웠다. 처음 가 본 길이 아니어서 더. 남탓이라는 출구를 닫으면 계단이 놓인다고 적은 적이 있다. (📝 모든 것을 나에게 귀결시키면 계단이 놓인다.) 모르는 걸 모르는 상태가 가장 고약하다고도 적었다. (📝 감정은 신호였다.) 다 적어 놓고, 또 빠졌다.
모르면 모른다고 하면 되는데. 모르는 걸 모르니까 남을 탓하고, 다른 이유를 찾았다.
그래서 하나를 정해 두기로 한다. 남탓이 떠오르면 그게 신호다. 내가 지금 모르는 게 있다는. 그때 한 줄을 적는다. 내가 지금 모르는 건 ___.
메타인지라는 말이 맞는지는 모르겠다. 나를 밖에서 보는 눈. 내가 아는지 모르는지를 아는 눈. 그 눈은 한 번 뜨고 끝나는 게 아니었다. 또 감기고, 또 떠야 한다.
아직
그만두고 싶은 마음은 그대로다. 실무를 못 하는 우울도 그대로고, 내일도 누군가는 딴 방향을 볼 거다.
다만 이유를 세어 보았다. 세고 나니 그중 몇은 내 탓이 아니었고, 몇은 내가 혼자 짊어질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다시 읽고 나니, 세는 손이 어디를 가리키고 있었는지도 보였다. 그 몇을 들고 디렉터 앞에 가 보기로 한다. 하소연 대신 한 장으로. 가안 맨 위에는 질문 하나를 더 얹기로 한다. 저는 아직 이걸 모릅니다. 같이 정해 주시겠습니까.
그 자리에서 무슨 답이 올지는 모른다. 아마 가안의 절반은 고쳐질 거다. 그래도 좋다. 고칠 수 있는 걸 들고 가는 게, 아무것도 안 들고 가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아직 포스트잇이 없어요. 첫 자리를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