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고민이 다음 단계로 이동한 회의
일주일짜리 압축 시간
금요일에 위에서 컨펌이 떨어졌다. 다음 주 R&R 킥오프 회의까지 일주일. 그 일주일 안에 — 상사 사전 싱크, 안 정리, 리더 회의, 다음날 R&R 킥오프 — 다 통과시켜야 했다.
압축된 시간이었다. 그런데 그 일주일이 가능했던 진짜 이유는 — 그 전에 깔아둔 무언가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걸, 회의가 끝나고서야 알았다.
분석이 답인 줄 알았다
리더가 되기 전엔 분석이 답이었다. 코드는 논리가 맞으면 돌아갔으니까. 버그를 찾고, 원인을 추적하고, 가설을 세우고, 검증하면 — 그게 일이었다. 답은 내 안에서 만들어졌다.
리더가 되고도 한동안 그 방식으로 일했다. 시나리오를 굴렸다. 옆 조직과 일을 어떻게 나눠야 할지, 어디서 시간을 줄일 수 있을지, 어떤 의존이 위험한지. 머릿속에서 만든 안이 대부분 맞았다.
그런데 안 움직였다. 시나리오가 맞는데도, 정확한데도, 그 정확함이 조직의 움직임으로 변환되지 않았다.
처음엔 내 분석이 부족한 줄 알았다. 더 정밀하게 만들었다. 여전히 안 움직였다.
분석과 종지부는 다른 축이었다
며칠을 더 굴리고서야 보였다. 분석이 정확한 것과 조직이 움직이는 것은 다른 축이었다.
조직은 "맞는 말"로 움직이지 않는다. 결정 권한 있는 사람이 종지부를 찍는 행위로 움직인다. 분석은 필요조건이고, 끄덕임이 충분조건이다.
시니어 엔지니어 출신 리더가 이 구간에서 제일 많이 깨진다. 실무자 시절엔 "올바른 분석 = 해결"이었으니까. 사람 시스템은 논리가 맞아도 안 돌아간다. 누가 말했냐, 언제 말했냐, 어떤 형식으로 말했냐가 결정 권한 있는 사람의 끄덕임을 만들어내야 비로소 움직인다.
분석에서 끝낼 수 없는 일이었다. 종지부까지 설계해야 하는 일이었다.
회의는 결정하는 곳이 아니었다
그 일주일에 일어난 일은 사실 흐름이 정해져 있었다.
먼저 팀 안에서 실현 가능한 범위를 끝까지 탐색했다. 어디까지가 우리 손으로 가능한지, 어디부터가 옆 조직 손에 달렸는지. 그 다음에 안을 정리했다. 정리한 안을 들고 상사에게 1:1로 갔다. 상사는 이미 자기 안에서 생각해둔 것이 있었고, 두 가지를 맞춰 보면서 구체화했다. 다음 날 전체 회의가 열렸다. 그 회의에서 공식 결정이 났다.
회의가 결정 회의가 아니었다. 회의는 추인 회의였다. 결정은 그 전날 상사와의 1:1에서 이미 거의 굳어 있었고, 회의는 모두가 같은 페이지에 있다는 걸 확인하고 공식화하는 자리였다.
그 패턴을 본 다음에야 알았다. 회의에서 결정하려고 하면 안 된다. 회의는 추인받는 자리다. 결정은 그 전에 핵심 인물과 1:1로 만들어둬야 한다.
그 회의에서 일어난 진짜 일
그 회의에서 일어난 진짜 일은 교차 검증이었다.
R&R뿐 아니라 — 우리가 추구하던 목표가 정말 위가 원하던 것이었는지, 옆이 기대하던 것이었는지, 처음으로 맞춰본 자리. 그동안 가장 목소리 큰 사람의 말로 굳어가던 결정들이 그날 거꾸로 풀려서 다시 정렬됐다. 목소리 큰 사람이 아니라 맞춰진 사람들이 결정의 주체가 되는 첫 순간이었다.
그날 회의가 끝나고 모든 고민이 다음 단계로 이동했다. 어떻게 소통할지, 어떤 스키마로 맞출지, 어떤 task를 어떤 일정으로. 풀려서 사라진 게 아니라 — 다른 종류의 고민으로 변환된 것이었다. 그게 진전이라는 걸 그날 처음 느꼈다.
두 개의 시계
회의가 끝나고 며칠 뒤에 알게 된 게 하나 더 있다. 그 일주일이 가능했던 진짜 이유.
리더 위에는 항상 두 개의 시계가 있다. 위 시계와 아래 시계.
위 시계는 위쪽 컨펌의 게이트다. 비용, 경영진의 OK, 더 큰 그림이 정렬되는지. 이건 내가 통제할 수 없다. 아무리 일찍 안을 만들어도 위 시계가 멈춰 있으면 결정은 못 굳는다. 상사도 못 찍는다.
아래 시계는 내가 통제할 수 있다. 팀 내 탐색, 시나리오 굴리기, 가능한 범위 깔아두기. 이건 언제든 굴려둘 수 있다.
내가 그 일주일에 답답했던 진짜 이유는 — 위 시계가 늦게 켜졌기 때문이었다. 분석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그리고 일주일 안에 통과시킬 수 있었던 이유는 — 그 전부터 아래 시계를 미리 돌려놓았기 때문이었다. 위에서 신호가 떨어졌을 때 즉시 발사 가능한 상태로 만들어둔 것이었다.
리더의 일은 어쩌면 두 시계가 안 맞을 때를 대비해서 항상 발사 가능한 안을 깔아두는 일에 가깝다. 위 시계는 통제 못 하니까, 아래 시계를 미리 돌려두는 일.
다음 편 호출
회의에서 모든 고민이 풀린 것 같았는데, 다음 주가 되자 새로운 종류의 모름이 들이닥쳤다. 어제까지 통하던 일하는 방식이 갑자기 무용해지는 일이.
세계가 패치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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