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체 무용한 것을 좋아하오
옆자리에 앉혀 둔 한 줄
지난 편, 식탁 모서리에서 줄 하나가 부딪혔다. 나는 원체 무용한 것을 좋아하오. 오래 전에 본 드라마의 한 대사다. 그날 그 줄은 옆자리에 앉혀 둔 채로 끝났다. 이번 편에서 그 줄을 따라 굴려 본다.
원체
원체라는 어휘를 따로 떼서 굴려 본다. 본디부터, 천성으로, 그렇게 생겨먹어서. 변명도 사연도 없이 그냥 그렇다고 호명하는 자리다. 그 한 줄을 풀어 쓰면 나는 본디부터 무용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그게 그렇게 단단한 자기 호명이라는 걸, 그 전엔 잘 몰랐다.
책상 위, 가방 안, 어딘가에
돌아보니 곁에 늘 무용한 것들이 있었다. 책상 위에 굴러다니는 작은 인형, 모니터 옆에 세워 둔 책 — 펴 본 지 오래된 — , 메모지 사이에 끼어 있는 그림 몇 장. 가져다 놓은 기억은 또렷하지 않은데 어느새 자리를 잡고 있는 것들. 누가 이건 왜 여기 있어요 물으면 잠시 멈췄다가 그러게요라고 답할 종류의 물건들.

효율이 안 잡는 시간
회사에서 굴리는 시간에는 이름표가 잘 붙는다. 작업 시간, 회의 시간, 검토 시간. 시간 단위로 잘리고, 그 안에 무엇을 했는지 자기에게도 남에게도 말할 수 있어야 하는 시간들. 그 시간들 사이사이에, 이름표가 잘 안 붙는 자리가 있다. 원체 무용한 것을 좋아하는 자리는 거기쯤 있는 모양이다. 효율이 영영 잡지 못하는 그 시간이, 어쩌면 가장 나중까지 남는 자리일지도 모른다.
우리 안의 환율
한 가지 떠오르는 환율이 있다 — 반년치 포인트와 분홍색 발바닥의 환율. 그게 우리 집에서만 쓰이는 환율이라는 걸, 그때는 몰랐다. 사실은 그 환율을 따라 사는 사람이 식탁에 세 명이 앉아 있다.
다만, 시작은 딸이었다
다만 누가 먼저 이 환율을 들고 왔는지는 솔직해야 한다. 내가 원체라는 어휘를 들고 와 자기 자리에 박는 게 가능해진 건, 딸이 먼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서다. 다음 편은 그 자리에 가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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